
필자는 1984년의 글에서 다른 기록을 찾아서 그곳이 발상지라고 말하는 것은 모르지만, 다산의 기록으로 그곳이 천주교의 발상지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역사의 왜곡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뜻있는 분들은 이점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 더 참고할 사항은, 억울하게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다산이 4년 뒤에 저술한 자신의 일대기인 「자찬묘지명」이나, 「권철신 묘지명」, 「정약전 묘지명」은 그 저술 목적이 그들의 일생의 업적을 밝히려는 뜻도 있지만, 가장 큰 목적은 자신이나 권철신 및 정약전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고, 정치적 당파싸움에 몰려 억울하게 탄압받고 죽음을 당했다는 내용을 밝히려는 뜻에서 기술한 글인데, 그 글에서 인용하여 천주교 발상지의 근거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권철신이나 정약전은 그처럼 엄격한 규정을 정해놓고 독실하고 공손하게 전통적인 경학공부에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을 말했는데, 그런 구절이 천주교 연구라고 말한다면 자가당착도 유만부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 훌륭한 강학회가 그 7년 뒤인 을사년(1785)의 천주교 사건 때문에 다시는 열릴 수 없었다고 애석해하면서, 7년 전의 강학회는 천주교와는 무관함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 1785년(을사년) 명례방(서울 명동)에 있는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집회를 하다가 형조의 금리들에게 적발된 사건. 천주교가 최초로 문제된 사건)
천주교 쪽의 “강학모임은 이론적인 학술연구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수도생활을 겸한 모임이었으니, 권철신 자신이 직접 만든 생활시간표나 규정에 의해서, 이른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서 얼음을 깨고 찬물로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는 새벽 기도문을 바치고, 해가 뜬 다음에는 오전 기도문을 바치고, 정오에는 낮 경문을 외고, 해가 지면 다른 경문을 바쳤다”라고 엉뚱한 해석을 해서 그곳이 천주교 발상지가 되었으니 세상에 이런 엉터리 역사가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다시 분명히 말합니다. 다른 기록을 인용하거나, 새로 찾아낸 내용을 근거로 한다면 모르지만 다산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그곳이 천주교 발상지라고 한다면, 다산을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혀 둡니다. (인터넷에서 ‘천진암’을 검색해보면 그곳이 한국천주교 발상지라고 확정돼 있기에 밝혀 보았습니다.)
※1985년 12월에 간행된 졸역 『다산산문선』(창작과 비평사)에는 다산의 「자찬묘지명」,「녹암권철신묘지명」,「선중씨 정약전 묘지명」이 완역되어 있으니 참고하면 전모를 아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