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간의 외길인생 양복명장으로 인재양성 매진
46년간의 외길인생 양복명장으로 인재양성 매진
  • 민경범
  • 승인 2004.12.04 1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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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유 네트웍 가맹점 통해 기존고객유치 평생을 두고 자기 일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우리에게 언제나 경외감과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특히 그 일이 빛이나던 아니던 간에 변함 없는 장인정신으로 삶을 지켜온 것은 인생의 진주와도 같다. 그 가운데 1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양복으로 46년이라는 인고의 세월 속에 자신만의 기술을 습득하고 또 이를 후배들에게 가르치며 인재양성에 매진하고 있는 김기수 명장(기술라사 대표). 김 명장은 지난 1996년 노동부와 인력관리공단에서 선정하는 양복직종 대통령 표창을 받은기능명장이다. 「양복기술은 나에게 가난에서 벗어나고 더불어 행복을 가져다주었으며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해주었다」며 '다시 태어나도 양복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김 명장은 양복에 대해서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예찬론자다. 김씨가 양복직종에 있어 명장이 되기까지는 많은 고통의 세월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처럼 양복기술을 배우게 동기는 우선 배고픔에서의 탈출에서다. 전남 강진출생으로 소작농의 외아들로 태어나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가정형편 때문에 57년 청소년시절부터 직업전선에 뛰어든 김 명장은 첫 직장으로 전남 장흥군의 한 양복점을 찾아가 침식제공 만을 조건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복기술을 배우겠다고 약속하고 기술습득에 나섰다. 누구나 처음에는 그렇겠지만 김 명장의 손은 바늘에 찔리고 가위에 베이는 등 손이 성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3년 보내고 어느 정도 자신이 붙은 김 명장은 60년 경기도 오산의 대성라사에 정식기술자로 자리를 옮겨 처음으로 월급을 받던 그 날의 감격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 때 김 명장은 첫 월급을 모두 저금했는데 이런 모습을 지켜본 사리원 출신의 양복점 주인은 김 명장의 성실성과 장래성을 보고는 중매를 자청, 지금의 부인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후 김 명장은 지난 70년 서울로 올라와 김포공항 근처에 터를 잡아 지금의 기술라사를 개업했다. 김 명장은 양복점을 개업한 후에도 양복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게을리 하지 않아 73년 양복 1급기능사 자격을 취득한 데 이어 90년에는 제5회 한국남성복기술경진대회에서 대상인 노동부장관상을 받는 등 각종 기능대회에서 인정받아 마침내 96년에는 각 부문의 최고의 장인인 명장에 선정됐다. 가봉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몸에 맞는 양복을 지을 수 있는 이른바 시스템오더를 개발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양복기술교류활동 재소자 재활의지 심어 줘 김 기수 명장은 자신의 양복기술을 많은 사람들이 배워 업계의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되도록 후진양성에도 매진하고 있다. 특히 평소 교정행정에 남다른 관심으로 불우한 재소자의 직업교육훈련을 적극 지원하고자 1989년부터 교도소 내 공공직업훈련원의 양복분야 직업훈련 강사로 위촉받아 재소자들에게 국가기술 자격을 취득케 하고 동시에 재활의지를 심어주고 재범방지를 위한 기술교육은 물론 정신교육에까지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양복업계의 발전을 위해 중국과 일본 등 해외에서도 양복기술강습회 강사로 활동하면서 기술교류도 함께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양복기술은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때문에 자국에서의 기술발전도 중요하지만 우리기술을 외국에 알려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도 국위선양의 한 방법이며, 기술교류를 통해 국가 간의 우위와 민간친선 외교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라고 김 명장은 말한다. 김 명장의 양복기술은 기존방식과는 좀 차이가 있다. 우선 양복제작 방식을 체형의 변화에 따라 보정과 재단방식을 변형하여 양복을 제작함으로서 옷이 울지 않고 몸에 잘 맞아 고객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안감 바이야스 자르기 공법'의 개발로 옷의 형태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만들어져 양복질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 사람의 체형을 7가지로 구분하여 형태에 따라 각각 새로운 재단법을 개발하여 공정시간과 품질향상에 기여함은 물론 양복저고리 심지개발과 바지 호주머니를 개선, 옷감을 절감하고, 보통 옷솔로는 떨어지지 않는 먼지도 깨끗하게 털어질 수 있도록 옷솔을 개선해 특허를 획득한 것이 김 명장만의 기술이다. 「옷은 사람의 피부와 같다. 피부처럼 편안하게 느껴지는 옷을 만들려면 먼저 손님의 심리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양복은 몸에 맞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양복이 그 사람의 인품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강조하는 김 명장은 언제나 양복을 만들 때에는 바느질 한 땀 한 땀에도 정성을 기울인다고 말한다. 한편 김 기수 명장은 과거에 비해 맞춤형 양복의 인기는 줄었지만 제이유 네트웍 가맹점을 경영하면서 기존고객을 유치하는 등 끊임없는 기술개발에 매진하고 있으며, 매년 개최되는 서울지방기능대회나 전국기능대회의 양복부문 심사위원을 맡아 기술지도는 물론 후배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서광범을 비롯 개화파 정치가가 최초 한국의 양복은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정부가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제반제도를 개혁하는 데에서 복제개혁에 따라 입게 되었다. 96년(고종 33) 4월 7일 칙령 제78호로 육군복장규칙을 제정, 구군복을 폐지하고 서양식 육군복장을 제정하였으며, 1900년(광무 4) 4월 17일 칙령 제14호로 문관복장규칙을 정하고, 제15호로 문관대례복제식을 정하여 서양식 관복으로 바꾸었다. 서양식 문관복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것이며, 일본은 영국의 대례복을 모방한 것이었다. 개화기의 양복은 주로 관복으로 입은 것이며, 일부 상류층에서만 드물게 입었다. 따라서 이상의 칙령은 군복과 공복에 관한 규정이지 일반 남자나 부녀자들의 복장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서유견문, 고종시대사 등 한말의 자료에 따르면 공복이 아닌 일반 시민복으로서 양복을 제일 먼저 입은 사람은 구한말의 개화파 서광범을 비롯 김옥균·유길준·홍영식·윤치호 등이 1882년, 일본에 수신사로 건너가 구입하여 입은 것이 최초인 것으로 전해진다. 교복으로서 양복을 가장 먼저 채택한 학교는 남자학교로는 배재중학교이고, 여학교로는 숙명여학교였다.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양복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점차 한복보다는 남,녀 모두가 양복, 양장을 선호했다. 특히 8·15광복 후 한국의 복장은 많은 변화를 보였는데, 한복은 노년층이나 일부 농촌지역의 복장으로 후퇴하고 양복이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현대 한국인의 복장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이와함께 60년대는 C.디오르의 처진 어깨와 우아한 롱스커트가 등장하여 우리의 의상계를 풍미하였고, 70년대는 화학섬유의 발달과 더불어 의료의 풍족으로 기성복이 발전함으로써 패션 산업의 소지를 만들었으며, 8, 90년대부터는 캐주얼 스타일이 의상계를 이끌어가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맞춤복만이 가지고 있는 멋스럼움의 향연으로 그인기는 이어가고 있다. 민경범기자 mkb@sisafoc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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