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현 금감위원장 과거 분식회계 '사실상 사면' 관측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은 8일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관에서 열린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초청 강연회에서 내년 1월부터 시행될 예정인 집단소송제와 관련, “기업들이 느끼고 있는 분식회계 소급적용에 대한 불안감을 털어줘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 고위 관계자가 재계의 요구를 전향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것은 처음으로, 앞으로 당정간 조율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일단 정기국회가 9일 끝나고 임시국회가 열리지 않으면 법안 처리가 내년으로 미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윤 위원장의 발언의 무게를 볼 때 정부 주무부처인 재정경제부와 금감위는 이미 기업의 과거 분식회계에 대해 '사실상 사면'방침인 것으로 관측되고 있지만 시민단체의 반발로 논란이 예상되고 있다.
尹위원장, ‘집단소송적용에 대해 기업들의 우려를 덜어줘야...’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은 ‘국가경영전략연구원 수요간담회’에 참석, "집단소송제는 과거보다 향후 투명성 강화를 위한 것이므로 소급적용에 대한 기업들의 우려를 털어줘야 한다"며 "정부내에서 컨센서스(의견일치)가 이뤄가고 있다"고 밝혔다.
또 "증권 집단소송 적용은 정책 일관성 측면에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지만 과거 소급을 최소로 피하기 위해 정부와 당이 현재 논의 중"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결국 과거 분식회계에 대해서도 집단소송이 가능해지면 기업이 막대한 소송 비용으로 부실해지거나 도산할 수도 있다는 재계의 우려를 정부가 감안해 주기로 한 것이다.
윤 위원장은 "증권 집단소송 적용에 대해 기업 이상으로 우리도 우려하고 있으며 분식을 기업만의 책임으로 돌리긴 어렵다"며 기업들의 분식회계에 대한 불가피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윤 위원장은 또 "집단소송제는 과거보다 향후 투명성 강화를 위한 것이므로 소급적용에 대한 기업들의 우려를 털어줘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소견"이라며 "다만 법 부칙 개정이 필요한 사항이며 기업은 준비를 철저히 하고 정부도 불안을 불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의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사항을 선별해 공시대상에서 제외하도록 명시하는 등의 보완책을 강구하겠다"면서 "기업이 본의 아니게 실수로 공시서류에 기재오류를 범해 소송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각종 회계, 공시 용어의 명확성도 높이겠다"고 강조했다.
윤 위원장은 외국계 자본의 차별 논란과 관련 "대국이 하면 로멘스고 힘약한 나라가 하면 스캔들은 아니지 않냐"고 반문한 뒤 "개방에 대한 거부감이나 부정적 인식을 갖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개방속에서 우리 주권은 지켜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FT)가 윤 위원장의 국내은행 외국계 임원 숫자 제한 언급을 빌미삼아 한국의 민족주의 성향이 경제 개혁을 늦추고, 외국인들의 투자유치는 커녕 진입을 막고 있다며 비난한 것에 대한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낸 것으로 보인다.
윤 위원장은 외국자본의 진출은 환영할 만한 일이고 더불어 가야 한다면서도 "4대 강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공격과 방어의 균형 속에서 금융산업이 발전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배당과 유상감자 등을 통한 국내자본의 외국유출 문제에 대해서는 "배당 가능범위를 조절하는 법률 개정이 필요하다고 정부에 제안했다"며 "유상감자시 사전인가 또는 승인여부를 검토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으며 지금이 논의의 시작단계"라고 말했다. 윤 위원장은 "여기에서도 내국인과 외국인간 차별이 있어서는 안되며 역차별도 없어야 하는 등 동일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 위원장은 또 미공개정보 이용 행위 등의 불공정거래 조사와 관련 "내부자의 범위를 계열회사 임직원과 같이 내부정보에 실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자까지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며"이라며 "애널리스트가 미공개정보를 기초로 유가증권의 매매를 추천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방안 등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제3자 배정 유상증자 등을 통해 불법적으로 퇴출위기를 모면하고 수익을 올리는 사례가 있는지를 조사해 법규위반 사실이 발견될 경우 고발 등을 통해 엄정히 조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는 14일부터 등록신청을 받을 예정인 사모투자전문회사(PEF) 제도에 대해 윤 위원장은 "사모투자전문회사 설립시 등록 단계에서 설립의 적법성을 엄격히 확인하고 운용주체(무한책임사원)에 관한 감독정보를 충분히 확보하는 한편 사모투자전문회사가 경영권 참여 이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용되지 않도록 사후 감독과 검사에도 만전을 다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윤 위원장은 자본시장 활성화 방안에 대해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유동성 사정이 크게 호전되고 있는 만큼 여유 유동성이 무수익자산에 유휴자금으로 방치되거나 과도한 배당으로 유출되기 보다는 적극적인 자산운용을 통해 산업자금으로 재투자돼야 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과거 분식회계 사면’은 사실상 증권집단소송법 사문화 시도
이에 앞서 이미 지난 1일 전경련 등 재계 주요단체가 올해까지의 분식회계가 내년 1월1일부터 시행되는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사면해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여야 일부의원이 이에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일 국회에 따르면, 전경련, 대한상의,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코스닥등록법인협의회, 한국공인회계사회 등은 최근 국회에 제출한 청원서에서 "'이 법은 법 시행 후 최초로 행해진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분부터 적용한다'는 증권관련 집단소송법 부칙 2항을 확대해석할 경우 과거에 이뤄진 분식회계도 집단소송의 대상이 되는 만큼 보완책을 마련해줘야 한다"며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 관련 부칙의 개정을 요구하는 입법청원을 한 것이다.
하지만 증권집단소송제도 실시를 2년 더 늦춰달라는 재계 등의 요구는 ‘개혁입법의 후퇴’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었다.
이 같은 사안에 시민단체는 법안의 의미를 중대하게 훼손하는 일이라는 입장이다. 또한 과거 분식을 바로
잡는 것만을 면책해 준다지만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과거가 어디 있느냐는 반론이다.
경실련 홍종학 재벌개혁위원장(경원대 경제학과 교수)은 “기업이 준비하라고 법 제정 후 시행을 1년 유예해줬는데 또다시 과거 분식회계까지 사면해 달라는 것은 무리한 측면이 있다”며 원안대로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입법 취지가 미래 분식을 예방하자는 것인 만큼 법을 그대로 시행하면서 문제가 있다면 법원이 그 취지를 살려 운용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던 금융감독위원회가 재계 입장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침에 따라 기업의 과거 분식은 면책될 것이 확실시된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도 “(기업이 과거에 저지른 분식은 면책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만 당내 최종 의견조율 과정은 남아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소장 :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7일 정부여당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2005년 1월 이전의 분식회계만 따로 떼어 사면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이는 사실상 분식회계를 집단소송의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증권집단소송법은 이미 오랜 입법 과정을 거치며 각계의 수많은 의견 조율과 논의가 있었고 재계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된 것인데 법시행 직전에 개정요구를 또다시 하는 것은 법안을 사문화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참여연대의 지적처럼 재계의 청원에 대해 일부에서는 ‘물타기’라는 지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업들이 증권집단소송제 시행으로 과거의 잘못까지 소급 적용될 수 있다는 데 대해서 불안해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전경련의 조사에서 85.4%에 이르는 기업들이 증권집단소송이 과거분식에까지 소급해서 적용될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응답업체의 86.8%는 과거 분식회계가 있는 기업의 경우에 과거 분식회계의 해소방안이 마련된다면 이를 적극 활용할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기업들이 과거 분식회계의 해소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답한 조사결과는 이들이 갖고 있는 부담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각에서는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하고자 하는 증권집단소송법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기업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으로 투명경영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기업들에 한해 과거 분식회계에 대한 소급 적용을 하지 않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증권집단소송제도의 실시시기를 2년 늦춰 2007년부터 1월 1일부터 적용하도록 하는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해 놓은 상황이지만 정부여당의 법시행의지가 확고해 내년부터 법이 시행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의 과거 분식회계에 대한 사면이 이뤄져서 적용될 이 법안이 기업들의 경영 투명성을 제고하는 데 얼마나 역할을 하게 될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홍재형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은 같은 날 이날 오전 C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경제계에서는 경제계대로 과거 분식회계에 대한 어떤 조치도 하고 또 과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형사상 문제는 해결해 줄 수 있는 방안이 없는지 지금 정부와 협의중"이라면서도 "여건이 되면 제계의 요구를 검토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정부가 증권집단소송법이 공포된 올해 1월 20일 전에 이루어진 기업의 분식회계를 소송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향으로 공식 의견을 마련하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기업 분식행위가 집단소송 대상에서 제외되는 시점의 기준을 법 시행일인 2005년 1월 1일이 아닌 공포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일부 의원들은 집단소송법 개정안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공동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야가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개혁 법안 처리 문제로 격돌하고 있어 법안 심의가 뒤로 밀릴 가능성이 높고, 개혁성향이 강한 여권내 의원들과 시민단체의 반발도 예상돼 집단소송법의 연내 국회통과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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