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온 길을 보면 갈 길도 보인다
1987년 5월18일 천주교명동성당에서는 5.18광주항쟁 희생자를 위한 기념미사가 봉헌되고 있었다. 미사가 끝나갈 무렵 김승훈 신부가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성명서가 들려져 있었고 잠시 후 김승훈 신부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순간 성당 안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조작되었습니다.”
폭탄이었다. 세상을 발칵 뒤엎는 분노의 폭탄이었다. 이로부터 군사독재 하에서 신음하던 민초들은 분연히 일어섰다. 민주화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 독재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은 이 땅의 민주화를 이끌어 온 견인차였다. 국민들은 사제단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 후에도 사제단은 매시기 독재정권의 억압 아래서 할 말을 못하고 침묵하는 국민들은 위해 늘 앞 장 서서 발언을 해 왔다.
국민들은 사제단을 신뢰했고 만약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면 사제단의 행동은 아무 의미도 힘도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시절 사제단이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함세웅 신부 등 독재를 반대하고 민초를 어루만지던 사제들은 힘없는 자들의 희망이었다.
이번 어마어마한 삼성비리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도 사제단이 없었으면 결코 용기도 내지 못했을 것이고 삼성이란 거대 재벌은 독야청청 대한민국을 손안에 쥔 채 또 다른 왕국으로 황금시절의 태평성대를 구가했을 것이다.
사제단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역사적 거사를 해냈다. 국민들은 사제단을 믿었다. 사제단을 지지하는 국민의 시퍼런 눈이 있기에 삼성특검이 결정되고 비록 미진하나마 지금 진행된다고 믿는다.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온 갓 의혹들은 차마 저럴 수가 있었을까 할 정도로 국민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무식한 국민들이라고 웃지 말라.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는 만화 이미지를 확대한 96.5㎝의 그림 ‘행복한 눈물’을 715만 9500달러로 구입했는데 지금은 서너배 올랐을 것이라고 한다.
누가 샀을까. 아직 모른단다. 정말 모르는가. 이렇게 국민을 놀려도 되는가. 이래서 때로는 하늘이 무심하다고 하는 것일까.
돈뭉치로 성을 쌓아도 할 말은 없다. 이 나라는 자유 민주국가니까. 그러나 돈으로 성을 쌓는 자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뭐가 뭔지도 모르는 안개 속에서 삼성특검은 이상한 형태로 번져 나간다. 전방위 특검인 듯한데 국민은 허탈하다. 김성호와 이종찬, 황영기는 조사를 받는가? 국민은 궁금하다.
삼성은 겁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삼성왕국은 언제나 유비무환이다. 김용철 변호사와 사제단이 폭로한 삼성의 이른바 검찰관련 떡값 로비는 전천후 요격기다. 왜 그런 행위를 했을까. 삼성은 늘 유비무환이다.
뚫고 들어가지 못한 곳이 없다. 대한민국에서 삼성 떡 값 로비와 관련이 없다는 고위층이라면 열등감을 느낄 것이라고 한 어느 인사의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문제는 이 같은 세계 재벌사에 없는 부도덕한 행위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다. 정상적인 세상,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국민이라면 이런 엄청난 범죄행위가 폭로될 때 분노보다는 웃어야 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제대로 된 세상이다.
어떻게 정상적인 사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이걸 거짓이 아니라고 한다면 뭐가 거짓인가. 사실이 아니라고 머리를 저어야 한다. 상식이 있지 않은가. 이 나라가 이 정도로 타락했단 말인가.
그러나 국민들은 사실일 것이라고 믿는다. 왜일까. 바로 사제단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사제단의 발표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믿는 것이다.
국민들이 전두환 정권이 5.18민주항쟁을 좌익폭도들의 폭동이라고 했을 때 믿었던가. 김형욱이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발표할 때 국민이 믿었는가.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사건,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했다고 발표했을 때 믿었던가. 중앙정보부장이 치안국장이 검찰의 고위관계자들이 온 갓 증거를 들이대며 발표하는데도 국민이 믿었던가.
겉으로는 몰라도 속으로는 믿지 않았다. 왜일까. 그들은 국민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늘 거짓말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들이 사제들의 말은 믿는다. 왜일까.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나라 경제의 상당부분을 책임지는 삼성이 그토록 아니라고 하는데도 왜 국민들은 믿지를 않는가. 야속할 것이다.
뒤를 돌아 다 보라. 그들이 걸어 온 발자국 마다 고인 많은 눈물이 있을 것이다.
삼성이 걸어 온 발자국에 담긴 눈물은 한의 눈물이고 사제들이 걸어 온 발자국의 담긴 눈물을 민초들이 사제를 믿는 신뢰의 눈물이다. 이것이 구별 되지 않는단 말인가.
사제단과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떡 값 로비 인사들은 검찰 고위층을 비롯해서 국정원장에 내정된 김성호 그리고 청와대 민정수석 이종찬 과 우리은행장 황영기다.
사제단이 이들의 명단을 발표하기 1시간 전에 청와대 대변인은 이들의 혐의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사제단이 발표도 하기 전에 미리 알아 낸 것은 독심술을 익혔기 때문인가.
그냥 짐작한 것이 딱 들어맞은 요행인가. 점쟁인가.
그런데도 기자들은 침묵이다. 참 신통하다. 어떻게 그토록 얌전한가. 대변인이 불편할까 봐 준 것인가. 대변인이 기자 출신이라서 동료의식이 아직 남아 있는 탓일까.
김성호 이종찬 황영기 관련 사제단의 기자회견에도 기자들이 별로 질문을 하지 않는다.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는 생각은 기자들의 자유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국민들의 관심이 없는 사건인가. 사건이 있으면 기자가 있고 기자가 있으면 질문이 있다.
YTN의 돌발영상은 사라졌다. 그러나 해외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 올라 온 <돌발영상> '마이너리티리포트'편은 8일 오후 6시 현재 4만8000회 이상의 조회 수를 보인다고 한다. 왜 이 짓들을 하는가.
지금 국민들의 마음은 어둡다. 죄도 없는 ‘고소영’이나 ‘강부자’와 강금실이 입에 오르내린다. 이들의 이름을 들으며 마음이 괴롭다.
김성호 국정원장 내정자, 이종찬 민정수석과 황영기의 이름을 들으면 슬프다. 이 나라 국민 된 사람치고 어느 누가 나라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국민의 불신이 국력을 떨어트린다. 국민이 믿게 해야 한다. 사제단이 쌓아 온 신뢰가 얼마나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가.
정부가 이런 신뢰를 얻는다면 그것은 백만 대군이다. 정직해야 한다. 국민은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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