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이 경영일선으로 돌아왔다. 두산가(家) ‘형제의 난’ 이후 2년여만의 일이다. 박 전 회장은 지난 2월27일 시공능력평가 55위의 중견건설사 성지건설 지분 24.4%를 인수, 경영권을 거머쥐었다. 기업 경영에서 자의든 타의든 손을 떼야 했던 박 전 회장이 다시 일선 현장으로 컴백한 순간이다. 갈 길이 바빴던 탓일까. 박 전 회장은 자신의 두 아들과 최측근 인사를 성지건설 등기이사와 사외이사로 추천하며 경영권 행사에 벌써부터 바쁜 모습이다. 그동안 공공연하게 두산가로부터 배제되면서 재계 변두리에 머물러야 했던 박 전 회장. 그가 다시 재계의 중심으로 한 발짝 다가오면서 ‘킹메이커’로 또다시 부상하게 될 지 이목이 쏠린다.
두산가와의 앙금, 장하성펀드 공격…가시밭길 예고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지난 2월27일 성지건설은 최대주주인 김홍식(명예회장) 외 8인이 보유한 주식 총 146만1111주와 경영권을 총 730억5555만원에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에게 양도했다. 박 전 회장으로서는 두산그룹 오너 일가의 비리 의혹 폭로에 따른 경영권 분쟁 촉발로 2005년 7월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2년8개월만의 경영일선 복귀 순간이다.
두산가와 완전한 결별?
박 전 회장은 고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 회장의 차남으로 1996년 12월부터 8년8개월 동안 두산그룹을 진두지휘 했다. 하지만 2005년 초 3남인 박용성 회장을 그룹 회장으로 추대한 인사에 반발해 박용성, 박용만(5남) 등 오너 일가의 비자금 조성 의혹 등을 폭로, 파문의 중심에 섰다. 이에 따라 박 전 회장은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두산그룹 전체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던 이 사건이 바로 ‘형제의 난’이다.

이와는 달리 ‘형제의 난’으로 함께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던 두산가 오너들은 이미 두산그룹 경영에 복귀한 상태다. 실형을 선고받았다가 2007년 초 특별사면된 박용성 회장은 당시 두산중공업 경영참여를 공식선언하며 발빠른 행보를 보였고, 박용만 부회장도 두산인프라코어의 경영을 맡아 2007년 12월20일자로 회장직에 올랐다.
여기에 ‘형제의 난’에서 한발 비껴서 있던 4남 박용현 이사장도 두산건설을 통해 경영 전면에 나섰고, 맏형인 박용곤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원, 지원, 박용성 회장 아들인 진원, 박용현 회장 아들인 태원 등 창업주 4세들도 모두 두산그룹 각 계열사 경영 핵심에 포진해 있다. 이들은 (주)두산 지분매집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후계경쟁에 돌입한 모습이다.
아무튼 이처럼 두산가 일원들의 경영행보가 활발했지만 그동안 박 전 회장은 전혀 경영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또 ‘형제의 난’ 이전 두산산업개발 (현 두산건설)상무로 후계구도 중심에 섰던 차남 중원씨는 두산 경영에서 손을 뗀 뒤 잇달아 경영에서 쓴맛을 보는 고충도 겪었다. 정원씨는 지난해 뉴월코프를 인수하면서 코스닥시장에 입성했다가 8개월만에 경영권을 매각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래서였을까. 이번 성지건설 경영권 인수 이후 박 전 회장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성지건설과 업계 등에 따르면 이미 성지건설 경영진 밑그림까지 그려지고 있다. 경원, 중원 두 아들을 비롯한 최측근 인사들을 등기이사 및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한 것이다.
장남 경원씨는 두산산업개발 영업사업본부 상무를 거쳐 전신전자 대표 등을 지냈고, 차남 중원씨도 두산산업개발 영업사업본부 상무를 지냈다. 또 두산건설 상무를 지낸 윤양호씨도 등기이사 후보로 추천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회장 일가가 이처럼 건설업에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는 점이 성지건설 인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겠느냐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박 전 회장 역시 두산그룹 오너 시절 건설사에 남다른 애착을 보여 왔다. 예컨대, ‘형제의 난’이 촉발된 계기 중 하나가 두산산업개발을 분리해 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점이 한 몫한 것으로 알려진다.
때문에 꾸준히 M&A설이 제기되어 왔던 성지건설은 박 전 회장 일가가 제기의 발판을 마련할 좋은 호재가 될 전망이다. 성지건설은 시공능력평가 55위의 중견건설사로 현금성 자산이 800억원에 달하는 알짜배기 회사다.
출발부터 만만찮은 복병
하지만 박 전 회장이 넘어야 할 산은 아직 높다. 성지건설의 외국인 지분(23%) 비율이 경영권 행사에 부담인 데다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장하성펀드)가 지분 5.11%를 보유하고 있다. 이미 장하성펀드는 박 전 회장 측이 추천한 이사 후보들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오는 3월21일 예정된 주주총회 결과가 박 전 회장 재기의 분수령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뿐만 아니다. 성지건설의 사업영역이 두산건설이나 두산중공업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점도 부담이다. 두산가와의 앙금이 혹여 사업 영역에서 사사건건 마찰을 빚지는 않을까 하는 이유에서다. 일각에선 와신상담한 박 전 회장 일가가 두산그룹과의 전면전에 나서기 위해 성지건설 경영권 인수에 욕심을 내지 않았겠느냐는 뒷말도 나온다. 그러나 박 전 회장 측이나 두산 측 모두 이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는 분위기다.
그동안 재계 복귀를 희망한 것으로 알려진 박 전 회장. 한때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과 한국야구위원회 총재를 맡을 만큼 대외활동에 욕심이 많았던 그가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재계 킹메이커’로 부상하게 될 지 여론의 관심이 모아지는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