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전경련 회장단 만찬을 주관하며 그 배경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약 10개월간 전경련에 발을 끊었던 정 회장이 갑작스럽게 전경련 활동을 재개하는 것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 것일까. 재계 일각에서는 정 회장의 이런 변심이 그가 처해있는 속깊은 고민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정 회장은 그룹 안팎으로 풀어야 할 글로비스 비자금 사건, 경영악화 우려 등의 매듭이 산재해있다. 하지만 마땅히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는 것도 사실. 정 회장을 움직이게 한 6가지 크고 작은 고민을 <시사신문>이 짚어봤다.
실적악화 해법 암흑…해외사업 부진에 노사마찰 징후까지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재계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낼 전망이다. 지난 3월13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만찬을 정 회장이 주재하면서 재계의 이목을 한몸에 집중시킨 것이다. 정 회장이 이런 만찬을 주도하는 것에 대해 재계 일각에서는 “이명박 정부 출범을 계기로 재계 리더로 입지를 넓히려는 계산이 깔렸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그동안 전경련에 소극적이었던 정 회장의 행보가 10개월 만에 적극적으로 변하는 셈이다.
정 회장이 갑자기 이렇게 대외적인 전경련 활동을 시작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재계에서는 애당초 정 회장이 전경련에 아주 발을 끊었던 것이 아닌 만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현재 정 회장이 짊어진 대내외 악재 속에서 활로를 ‘재계 화합’을 통해 찾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이명박 정권에 줄을 대기 위해 전경련 활동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실제 정 회장은 대외적으로 여수 엑스포 개최를 성공시키고 국내 자동차 시장의 긍정적 반응을 얻고 있지만 그 속에는 적잖은 고민을 끌어안고 있다.
비자금 사태 시련 세 가지
정 회장을 둘러싼 악재는 크게 사업부문에 대한 실적악화 우려와 비자금에서 이어지는 승계문제로 나눌 수 있다. 정 회장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한다. 비자금 문제가 해결돼도 경영상 난제를 풀지 못하면 경영능력 부족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정 회장 도덕성에 대한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정 회장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글로비스 비자금에 대한 사법처리를 빼놓을 수 없다. 2006년부터 불거져 온 이 사건은 지난해 9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으며 마무리돼는 듯 보였지만 곧 검찰이 “사회봉사명령이 통상적인 형태를 벗어난 것으로 판단한다”며 상고하며 다시금 수면위로 떠올랐다. 덕분에 고등법원 집행유예로 한숨 돌리던 정 회장으로서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1심에 실형을 선고 받고 2심에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지만 정작 대법원에서는 어떤 판결이 나올지 알 수 없는 탓이다. 행여나 대법원에서 징역을 선고받게 된다면 현대차는 대외적은 물론이고 내부적 경영에서도 큰 차질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정 회장은 비자금 사건 이후 자신과 정 사장이 보유한 글로비스 주식 전량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정 회장은 고등법원의 항소심 공판에서 사회공헌 방식이 글로비스 주식이 아니라 ‘현금’ 출연으로 하겠다는 점을 시사했다. 게다가 정작 사회공헌 방식은 정 회장의 현금 대신 보유 중인 글로비스 지분이었다. 정 회장 보유 지분 중 92만주를 해비치사회공헌문화재단에 증여하며 구색을 맞춘 것. 애당초 ‘정 회장 부자가 보유한 글로비스 주식 전량’에서 ‘현금’으로 변경됐다가 다시 ‘(정의선 사장 지분은 빠지고) 정 회장의 글로비스 주식’으로 증여방식이 바뀐 셈이다.
현재 정 사장의 글로비스 지분은 31.88%가 남아있는 상황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 지분이 핵심 계열사 지분 인수에 요긴하게 쓰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비자금의 핵이 됐던 글로비스 지분을 이용해 자금을 확보한다면 이에 대한 비난 여론도 만만치 않으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글로비스는 이미 비자금 사태 이후로도 계열사 물량 몰아주기 등으로 공정위에 과징금을 받은 바 있다”면서 “노골적인 승계 물밑작업이 이뤄지는 만큼 글로비스 지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2006년 정 회장이 법정에 서면서 정 사장이 기소유예로 수사 없이 넘어갔다는 점도 이런 전망에 힘을 싣고 있다.
해법 묘연한 여론 악화
이 과정에서 불거질 시민단체 등 세간의 반발도 이미 예고된 상황이다. 비자금 사태에 시달려 도덕성 논란에 시달려온 정 회장으로서는 세간의 이목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정 회장은 자신의 이미지 쇄신에 각별한 공을 들여온 바 있다. 여수 엑스포 유치활동이 바로 그것. 비슷한 시기에 이건희 회장 등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평창 동계올림픽이 실패로 돌아갔던 반면 여수 엑스포 개최가 확정되면서 정 회장의 위신도 높아졌다. 비자금 의혹으로 세간의 눈초리가 비판적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정 회장의 이미지 개선 작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그럼에도 글로비스 비자금 대법원 상고나 승계 문제가 다시 거론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이 또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미 경제개혁연대는 비자금에 대한 소송을 예고한 상황. 최근 주주총회에서 정부기관 국민연금기금도 정 회장의 재선임을 반대했고, 지난 2월29일 외국투자자문기업ISS의 ‘정 회장 대표이사 재선임 반대’ 의견을 냈다. 이에 현대차 관계자는 “글로비스 비자금 사건에 대한 세간의 시선도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며 “주총에서 정 회장 재선임이 통과됐다는 것은 아직 절대다수의 주주가 정 회장을 원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못 박았다. 비난여론이 형성돼도 크게 부담을 느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영실적 악화 세 가지 변수
때문일까. 정 회장은 현재까지 이렇다 할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정 회장이 도덕성 시비이상으로 ‘실적’을 증명해야 한다는 점도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현재 현대차의 당면한 과제는 해외사업 부분이다. 현재 미국시장의 현대차 판매량은 적신호를 울리고 있다. 해외사업이 부진한 가운데 특히 브랜드 경쟁력의 바로미터라고 불리는 미국시장의 판매가 하락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업계에서 “글로벌 판매강화라는 현대차의 목표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고 우려가 나올 정도.

그렇다고 국내시장의 전망도 밝다고만은 할 수 없다. 현대차는 지난해 9월 10년만에 임단협에서 무분규 협상이 이뤄졌지만 ‘무분규원년’ 선언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할 전망이다. 올해도 여지없이 파업으로 인한 노조갈등이 재현된 까닭이다. ‘클릭’과 ‘베르나’ 등 소형차를 생산하는 현대차 울산 1공장 노조가 사측이 소형차 판매부진을 이유로 1공장의 잔업과 휴일 특근을 실시하지 않기로 하자 지난 3월3일 공장 가동을 2시간 중단시켰다.
잔업과 휴일 특근을 하지 않으면 임금이 줄기 때문에 ‘2시간 잔업과 매달 휴일 특근 2회’를 회사측이 보장해야 한다는 게 노조측의 요구다. 사측은 노조대의원 대표를 경찰에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이에 노조대 노조의 갈등 양상까지 보이는 상황이다.
현대 통합 주도권 잡을까
이런 상황은 지난해 무분규 협상 이후 쏟아진 “노사의 소모적 대립구도 해결”이라는 재계의 평가를 뒤집는 형세라 우려를 사고 있다. 현대차의 고질적인 ‘노사 갈등’이 다시 제기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한편 이런 정 회장을 둘러싼 안팎의 고민은 최근 급변하는 현대가의 분위기와 맞물려 재계의 시선을 끌고 있다. 최근 범 현대가(家)의 긴밀한 움직임과 관련돼 ‘맏형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감도는 것이다.
정몽준 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이 연일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광고로 ‘정통성’을 내세우는 것에 비해 정 회장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현대건설 인수, 만도 인수 등에 가장 적극적 움직임을 보여준 것이 정몽준 의원이나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었음을 감안하면 정 회장이 자칫 범 현대가의 주도권을 잃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재계 다른 일각에서는 비자금 사건 등으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은 만큼 일선에 나서기에는 부담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관측 된다.
최근 사상 최고의 시가총액을 달성하는 현대중공업과 상반되는 상황이라는 것. 결국 정 회장에게 당면한 과제는 범 현대가 인수에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는가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짐작을 가능케 해주는 대목이다.
현재 현대차 측은 이런 대외적 난관에 대해 낙관하는 입장이다. 현대차 관련자는 “해외시장 부진에는 원화 약세가 어느 정도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면서 “노조 대 노조의 갈등까지 보이며 회사가 개입할 여지가 줄고 있지만 이전 같은 대규모 파업은 없을 것으로 전망한다”고 밝혔다. 때문에 경영악화가 크게 우려스러운 상황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현재 정 회장의 재계는 어느 때보다 활발한 행보를 밟고 있다. 재계에서는 정 회장이 연임을 통해 다시 현대차의 수장에 앉았지만 도덕성, 경영능력 등의 새로운 시험무대를 맞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재계 맏형으로 지목받는 정 회장. 각종 난관 속에서 적잖은 과제에 직면한 그가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