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그림자가 크기는 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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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짝달싹 못하는 이상득 국회 부의장 속사정

한나라당 ‘이상득 딜레마’, 고령·다선 다쳐내도 ‘이상득’만은?
“대통령 친형 효과가 당 공천 좌지우지한다” 비판 여론 거세
“국회 의장은 한 번 해봐야 하는데” VS “쳐 내면 물갈이 제대로”
이재오·박근혜·강재섭 당 핵심인사 조율권 ‘이상득 카드’ 쓴다?


▲ 이상득 국회부의장의 거취를 두고 한나라당 내 설전이 오가고 있다. 고령·다선의원을 공천했다는 비판여론과 당의 중심을 잡아줄 어른이 절실하다는 의견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상득 국회부의장이 한나라당의 ‘계륵’으로 떠올랐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이기도 한 이 부의장은 이 대통령과 마찰이 생길 경우 이를 조율할 수 있는 중간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공천혁명을 위해 고령·다선 의원들을 거침없이 쳐내는 과정에서 이 부의장은 당의 고민거리가 됐다. 결국 당은 이 부의장에게 공천했다. 하지만 이로써 당은 개혁의 의미와 효과가 반감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또한 이 부의장이 공천에서 탈락한 이명박계 의원들을 찾아 탈당과 출마를 만류하는 과정에서 ‘상왕정치’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부의장이 자진 용퇴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고 있다. 이제 ‘이상득’이라는 자신의 이름보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이라는 수식어로 불리는 이상득 부의장. 그를 둘러싼 당의 갈등과 고민을 쫓아봤다.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이상득 국회부의장은 세간의 이목, 그 중심에 서게 됐다. 이명박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 그 첫손에 이 부의장이 있기 때문이다.

동생보다 한 발 먼저

이상득 국회부의장의 삶은 이 대통령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 부의장이 한 발 더 빨랐다는 것 정도다.

이상득 국회부의장은 경북 영일군(현 포항시) 한 가난한 농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생 이명박 대통령과 풀빵장사, 봉투접기, 과일장사 등을 해야 할 정도로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집안 형편 때문에 야간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도 학업을 끈을 놓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재로 이름을 알렸으며 서울대학교 상대를 졸업했다.

1961년 (주)코오롱 공채1기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며 그는 ‘샐러리맨의 신화’를 쓰게 된다. 뛰어난 업무추진력으로 입사 17년 만에 국제적인 종합무역회사의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것. 이는 현대그룹 평사원에서 사장자리까지 오른 이 대통령의 삶과 닮아 있다.

이 부의장은 평소 뜻을 뒀던 정치를 위해 30여 년간 몸담았던 재계를 떠나 여의도에 입성했다. 13대 국회의원 선거로 국회에 들어선 후 그는 1997년 국회 운영위원장 및 한나라당 원내총무, 2004년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거쳐 2006년부터 국회 부의장을 맡는 등 당 내 요직을 두루 거친 5선 의원이 됐다.

주요 당직을 두루 거치다 보니 당내에서도 인맥이 넓기로 손꼽힌다. 온화한 성품과 자신을 낮추는 모습은 당 내 인사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평이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권 안팎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서울시장이었던 동생이 대선 출마 의지를 밝히고서 부터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6인회’로 불린 최측근 가신그룹부터 현대에서의 인연, 서울시장 시절의 인맥 등 ‘쓸 만한’ 인재들이 넘쳐 난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당 내에서 이 대통령은 비주류로 꼽혔다.

그런 이 대통령이 비주류에서 주류가 되기까지 그의 곁에는 충실한 조언자이자 후원자인 형 이상득 부의장이 있었다. 이 부의장은 이 대통령을 위해 당 내 세력 규합에 나섰다. 이명박 당시 대선후보와 박근혜 전 대표의 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중립에 섰던 이들을 이 대선후보 쪽에 서도록 설득한 것도 이 부의장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인재들이 이 부의장의 설득에 이 대선후보에게로 왔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전 대표측과의 터질 듯한 갈등도 이 부의장의 중재로 봉합됐다. 이 부의장은 양보와 타협으로 박 전 대표측을 다독였다. 경선 중재안과 ‘BBK 특검법안’을 수용의 뒤에도 이 부의장의 설득이 있었다.

이처럼 이 부의장은 경선에서 대선에 이르기까지 ‘보일듯 말듯’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이 대통령을 도왔다.

그러나 대선을 지나 총선이 가까워지며 이 부의장의 거취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73세 5선이라는 이 부의장의 나이와 경력은 공천 쇄신의 칼날이 날아들 ‘다선의 고령’ 의원의 조건에 부합했던 것.

한나라당은 이번 총선 공천에서 지역구 공천자 245명을 내정했다. 현역 지역구 의원 109명 중 42명이 교체돼 물갈이 비율이 38.5%에 이르렀다. 평균 연령은 51살. 그러나 이 중 70대 이상 고령은 2명뿐이다. 그리고 이 부의장은 당 1차 공천에서 일찌감치 공천을 약속받음으로써 73살로 최고령 생존자가 됐다.

한나라당의 3선 이상 의원 33명 중 5선의 김덕룡, 박희태, 4선의 이규택, 이강두, 3선의 맹형규(재심), 권철현, 김무성, 정형근, 박종근, 안택수, 이해봉, 이경재, 이재창, 권오을, 김광원(불출마), 이상배, 임인배, 김기춘, 김용갑(불출마) 등 낙천과 불출마로 인해 남아 있는 3선 이상은 14명에 불과하다.

이 중 5선 이상은 강재섭 대표와 정몽준 의원 등이 속해 있으나 ‘고령 다선’은 이 부의장이 유일하다.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이 부의장에게 공천을 줌으로써 당 개혁 효과를 감소시켰다”며 “고령·다선 의원의 전형으로 꼽히는 이 부의장으로 인해 탈락 의원들의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 이상득 국회부의장이 ‘포항·울산’에서 유세전을 갖고 있다. 사진출처: 이상득 홈페이지
이번 한나라당 공천은 ‘이명박계만 남았다’는 뜻의 ‘명·계·남’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듯 현역 의원들의 빈자리를 이명박계 신진 인사들의 채웠다는 평을 받고 있다. 넘쳐나는 이명박계에 비해 박근혜계 의원들은 40여 명 선으로 줄어 당내 비주류가 됐다.

한나라당 공천을 비판하는 이들은 이 부의장의 공천에 대해 ‘형님 공천’ ‘가계 공천’이라며 비아냥거리고 있다.

또한 이 부의장이 탈락한 친이계 인사들을 찾으면서 그에 대한 비판여론은 다시금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 부의장은 직접 공천탈락자들의 무소속 출마를 저지하고 나선 것이 눈총을 산 것이다.

이 부의장은 공천에서 탈락한 정형근 의원의 사무실을 방문해 “속상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공천 번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당을 봐서 슬기롭게 판단해 달라”고 했다.

또한 정 의원과의 비공개 회동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면 한나라당 표가 갈린다. 탈당과 (무소속)출마를 포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정 의원뿐 아니라 공천에서 탈락한 친이계 인사들에게 위로 전화를 걸어 탈당과 무소속 출마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그의 설득 덕분이었는지 일부 친이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불출마 선언이 이어졌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고령·다선이지만 대통령의 형이라는 이유로 공천 칼날을 피한 이 부의장이 탈락자들에게 불출마를 당부하는 것은 위로가 아닌 조롱”이라며 “벌써부터 상왕정치를 하려는 게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이 부의장이 이 대통령을 위해 고비마다 중재와 설득을 하는 등 온갖 궂은일을 하다하지 않은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73살의 고령으로 공천논란의 당사자가 된 사람이 공천 탈락자들의 출마를 만류할 자격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또 다른 의원은 “탈당과 무소속 출마는 본인의 선택”이라며 “이 부의장이 월권을 휘두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율’의 이상득 돌아오나?

이상득 부의장의 거취 논란으로 인해 정치권 일각에서는 ‘자진 용퇴’라는 해법을 내놓기도 했다. 이는 이 부의장이 스스로 물러나 정치적 논란을 종식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의견과 함께 박 전 대표측과의 갈등의 종식시키기 위해 이 부의장을 물러나게 한다는 주장도 강도높게 제기됐다.

그러나 정치권 한 관계자는 “당 입장에서도 이 대통령의 친형을 공천에서 배제시키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지역구에서 5선을 하는 등 탄탄한 지역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이 대통령과의 조율자가 되어 줄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다”고 이 부의장에 대한 공천을 분석하는 한편 “이 물러나도 이 대통령에게 갈 타격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 부의장을 ‘계륵’이라고 기피하는 것 보다는 이 부의장 특유의 ‘조율과 화합’의 정치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활용 방도를 모색하는 편이 빠르다”고 말했다.


이상득은 누구?

출생: 1935년 11월 29일
학력:
1961년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1999년 캠벨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2007년 호남대학교 명예 경영학 박사학위 취득
경력:
1979~1982 (주)코오롱 사장
1982~1988 코오롱상사(주) 사장
1984.12 주한세네갈 명예영사
1985.10~ 실로암 안과병원 이사
1987~1993 산업연구원 이사
1988~1992 제13대 국회의원
1992~1996 제14대 국회의원
1992~ 재단법인 고려학술문화재단 이사
1996~ 사단법인 한러 극동협회 부회장
1996~2000 제15대 국회의원
1999~ 한국발명진흥회 고문
2000~2003 한나라당 최고위원
2000~2004 제16대 국회의원
2003~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고문
2004~2005 한나라당 사무총장
2004~ 제17대 국회의원
2006~ 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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