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마침표는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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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 놓지 않으면 좋은일 생겨”


정이 넘치고 의욕 또한 강하며 매사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새로운 일에 두려움 보다 도전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 박용구, 그를 보면 사람을 살갑게 대하는 따뜻한 마음이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일까 그와 대화를 하다보면 솔직담백하고 정감이 넘치는 사람이란 걸 느껴진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 중에 하나다 군에 복무하면서도 못다 이룬 학업에 뜻을 품고 한양대 행정대학원에서 ‘한국의 토지정책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대전대 대학원에서 ‘지방의회와 자치단체장간의 생산적 관계정립에 관한 연구’로 47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늦깎이 박사이기도 하다

농업에 종사하던 양친(박운근. 최수옥)슬하에 4남 1녀중 3남으로 태어난 박 대표의 어린 시절 생활은 넉넉치 못했다. 그러나 내일의 희망을 잃지 않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세상을 대하면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아왔다.

희망을 품으면 꿈은 이루어져

박 대표는 “가정형편이 넉넉치 못해 늘 근검절약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가장 힘든 부분이 대학에 진학 하고 싶었지만 학비문제로 꿈을 이루지 못한 부분이었다”면서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루고 싶어 럭비를 시작했다 운동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서 였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며 당시의 기억이 되살아 난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늘 가난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박 대표는 군에 입대한 후에도 학문에 대한 열망을 품었다. 그는 “군 생활을 하면서도 학문에 대한 꿈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도 입시학원에 등록, 1년간 야간반 입시 공부를 시작했다.”면서 “몸은 고달프고 지쳤지만 마음만은 미뤄졌던 학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항상 뿌듯했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결국 28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명지전문대학 영어과에 진학하게 됐다. 이후 그의 학업에 대한 열정은 계속 이어지면서 한양대 행정대학원을 거쳐 대전대 행정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꿈에도 그리던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됐다. 이 부분이 바로 박 대표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인내심과 한 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내는 의지와 열정이 발휘된 것이다.

그러나 박 대표는 학문에 대한 자신의 꿈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생각이 들자 꿈에도 그리던 부모님이 항상 눈앞에 아른 거려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그리고 살아생전 자식에게 베풀어 주셨던 애틋한 사랑이 가슴을 짓누르며 그리움으로 복받쳐 올랐다.

그래서 2005년 4월, 잔잔한 감동을 주며 읽는 이들의 가슴을 적셨던 ‘어떠커니’를 출간하게 됐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풍기는 책, 무엇보다 비록 내가 실패를 하고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아도 언제나 가슴을 열고 찢긴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안아 주신 사랑의 어머니를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어머니 정말 사랑 했어요”, “어머니가 있어서 정말 행복 했습니다”, ‘어떠커니’를 출간하면서 했던 박 대표의 말 한 마디가 “3번이나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정옥자 전 육사교수의 말이 그 내용을 대신해 주고 있다.

내 어렸을 적,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형제들과 단란하게 지냈던 고향의 희미한 추억. 그 옛날 행복한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을 다시보게 됐다는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의 가족과 함께 했던 기억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서글퍼 이러한 아련한 기억들을 하나하나 메모해 놓아 결국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며 “그간 몇 번의 탈고 중 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를 때면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흐른다”고 회고했다.

‘어떠커니’는 특히 가족간에 대화마저 부족해진 이 시대에 ‘효’라는 의미를 잊고 사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한다. 또한 희미해져 가는 우리의 옛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포천 발전 위한 구심점 만들어야

박용구,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부모님의 품이 아닌 고향의 품이 그리워 고향을 찾았다. 포천군 신북면이 고향인 그는 고향에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자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자신이 태어나고 부모님의 살아생전 남기신 흔적이 묻어 있는 고향 포천에 둥지를 틀었다.

박 대표는 “그동안 공무원이란 신분 때문에 해 보고 싶었던 일을 미루어 왔다”면서 “퇴임 후 고향을 찾아 인생 후반기를 고향을 위해 바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할 수 있는 나이에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열정을 불태웠다.

그가 고향에 둥지를 틀고 가장 먼저 하게 된 일이 뉴라이트 포천연합 발기인 대회였다. 포천의 흩어진 민심을 한데 모으고 포천의 발전을 이루는 구심점을 만들기 위함 이었다.

이날 발기인 대회에는 포천지역 종교계, 경제계, 문화계. 안보단체 등 200여명이 참석해 뜻을 같이 했다. 뉴라이트포천연합 상임대표를 맡게된 박 대표는 이 자리에서 “뉴라이트 포천연합이 포천의 흩어진 민심을 한데 모으고 건강한 보수세력 결집의 구심점이 될 것”이라며 “어떤 특정 정치세력과 손을 잡는 정치단체가 아니라 애국 시민의 연합 단체요 지역 발전을 위한 단체”임을 강조했다.

고향인 포천을 위해 앞으로 많은 일을 구상 중인 그는 “미래 꿈과 비전이 있는 포천시가 되도록 분주하게 땀을 흘리며 일 할 것과 포천시민이라는 자긍심을 심어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을 약속했다.

봉사에도 관심이 많다. 봉사를 통해 진정으로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는 믿음을 전해주고 싶다는 그는 지난 1월 태안 앞바다를 시커멓게 물들인 기름유출 사건 때 뜻을 같이한 많은 사람들과 직접 태안을 찾았다.

많은 봉사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시커먼 타르덩어리는 거의 제거되었지만, 아름다운 해안은 여전히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현장을 직접 찾은 박 대표는 “수십년이 넘어도 회복될 것 같지 않았다”며 “돌과 자갈을 들어내면 그 아래엔 온통 시커먼 기름이 스며 있었고, 훔쳐내고 훔쳐내도 끝없이 기름이 나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특히 “돌과 자갈 하나 기름을 제거하면서 제 속이 다 타는 것 같았다”며 “하물며 삶의 터전인 태안의 해안마을 사람들은 오죽했겠느냐”며 안타까워했다.

최근에는 포천 지역에 위치한 ‘마리아의 집’에서 어르신 목욕봉사, ‘생수의 집’ 어린이들을 위한 봉사 그리고 정교리 마을의 모내기가 한창일 때 작은 일손이나마 힘을 보태기도 했다.

지역을 위해서라면 가장 먼저 팔을 걷어붙이는 박용구, 포천의 발전은 시민 전체가 합심하여 노력하는 자세를 보일 때 이루어 진다는 그는 오늘도 포천의 희망을 위해 땀을 흘린다.

포천시민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그가 고향을 위해 의지와 열정을 불태우고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쏟는 땀방울을 기억하고 있다. 더불어 고향 포천에서 제 2의 인생을 펼치려는 그의 힘찬 도약을 기대하며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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