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체제 출범 4년째 접어든 현대그룹의 분위기가 심상찮다. ‘전통 현대맨’들이 잇따라 사직서를 제출하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의 불화설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이유에서다. 특히 ‘마지막 현대맨’이라고까지 불리던 노정익 현대상선 전 사장까지 사퇴하면서 사실상 ‘전통 현대맨’이 모두 물러나게 된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 최근 현대상선이 이례적으로 노 전 사장의 스톡옵션을 전면 무효처리한다고 밝혀 그 배경에 재계의 촉각이 곤두세우고 있다. 현 회장과 전문경영인 사이 갈등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전 경영인과 회사의 갈등을 둘러싼 논란의 앞과 뒤를 살펴봤다.
떠나는 전문경영인 정황 둘러싸고 논란 가속, '팽'인가 '절 떠나는 중'인가
현대가의 내분을 두고 재계의 꾸준한 이슈를 몰고 왔던 현대그룹이 이번엔 전 전문경영인과의 갈등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현대그룹이 2003년에 부과된 노정익 전 현대상선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스톡옵션을 전면 철회하기로 결정한 까닭이다. 노 전 사장 퇴임에 현정은 현대상선 회장과의 갈등설이 꾸준히 제기됐던 만큼 스톡옵션 논란은 양자의 골이 깊었다는 방증으로 해석되고 있다.
스톡옵션을 막아라!
지난 4월14일 김성만 현대상선 사장은 “사장으로 부임한 이후 업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스톡옵션에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을 알았다”며 “스톡옵션은 법적으로는 물론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 무효화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현대상선은 조만간 이사회를 열어 스톡옵션 무효를 확정할 방침이다. 김 사장은 올해 취임한 뒤 당시 스톡옵션을 받은 현직 임원들에게 행사 포기 각서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 주목받는 것은 지난 1월에 퇴직한 노 전 사장이다. 그는 스톡옵션 부여로 가장 많은 혜택을 보는 인물로 꼽힌다. 스톡옵션 총 수량 중 약 20%에 해당하는 현대상선 20만주를 스톡옵션으로 받기로 했는데, 성사될 경우 평가차익만 80억원이 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김 사장은 스톡옵션 무효를 선언하며 발목을 잡았다.

현대상선의 이사회 의사록에 따르면 스톡옵션 결의는 2003년 8월11일 현대상선 본사의 영상회의실에서 이뤄졌다. 노 전 회장을 필두로 총 이사 8명 중 6명이 참여한 이 회의에서는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 부여에 관한 건이 논의됐다. 사외이사 일부의 반대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현대상선 임원 37명 전원에게 90만5000주(총 발행주식의 0.88%)를 주당 3175원에 매수할 수 있는 스톡옵션이 결정됐다.
논란의 시발점은 이날이 고(故) 정몽헌 회장의 영결식이 있은 지 불과 사흘 뒤였다는 점이었다. 당시 그룹 임원들은 삼우제를 위해 유품을 가지고 금강산에 갔고, 그룹 안팎에선 향후 경영권과 지배구조 향방을 놓고 고심하던 상황. 내부에서 ‘초상집에서 임원은 스톡옵션 잔치’라는 말이 돌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심지어 그 당시 임원들에게만 스톡옵션이 배정됐기 때문에 4개월 뒤 정기인사에서 임원으로 승진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적잖은 불만이 제기됐다는 내부의 목소리도 있다.
특히 재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대목은 노 사장 사퇴 이후 3개월이 지나서야 이 같은 논란이 불거졌다는 점이다. 2005년부터 행사할 수 있었던 이 스톡옵션은 이사회에서 결의된 이후 5년간 별 말이 없었다. 심지어 재계일각에서 노 전 사장의 사퇴 이유로 현 회장과 ‘스톡옵션 갈등설’이 일었을 때도 현대상선 측은 “외압은 없었고 스스로 대표이사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해 스스로 물러난 것”이라고 해명했을 정도.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스톡옵션에 대해 대대적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된 형국이다.
이런 현대그룹의 상황은 노 전 사장 사퇴 한 달 전에 사퇴한 김지완 현대증권 전 사장에게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임기를 1년여 앞둔 상황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퇴임했지만 1개월만에 경쟁사인 하나대한투자증권 사장으로 영입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하나대투증권으로 옮긴 뒤, 평소의 취미였던 산행을 여전히 즐기고 있어 ‘건강 악화’로 사퇴했다는 현대그룹의 설명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증권가에서 CEO영입에 필요한 사전작업이 적게는 3개월 이상 걸린다는 관계자들의 설명을 고려하면 이 전 사장의 ‘이직’ 욕구는 현대증권 재직 시절부터 있어왔다는 추측이 무성하다.
현재 재계일각에서는 현 회장과 ‘정통 현대맨’들 간의 갈등이 물밑에서는 보다 심각한 상황이 아니겠느냐는 뒷말까지 나돌고 있다. 현 회장의 행보가 사실상 ‘전통 현대맨’을 팽 시키는 것처럼 보여왔던 만큼 내부적인 반발도 적지 않았고, 이런 상황이 이같은 마찰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정은 회장의 갈등과는 무관하게 김 사장이 스톡옵션 문제를 지적하면서 불거진 것”이라며 “현 회장과이 아닌 스톡옵션 문제 자체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전문경영인의 사퇴 이유가 번복되는 등 뒷말이 이는 것은 그 사람 자체의 문제지 현 회장의 갈등으로 치닫지는 않는다는 설명이다.
안 풀리는 매듭 결국 법으로
하지만 이런 현대그룹의 입장에 대해 노 전 사장이 공감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노 전 사장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톡옵션은 정몽헌 회장과 구조조정본부에서 주도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대그룹의 주장처럼 법적인 문제는 전혀 없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라고 주장했다.
현재 업계에서는 노 전 사장과 현대그룹이 법정공방으로 치달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대기업에서 전 전문경영인과 소송까지 벌이는 것은 흔치 않은 상황. 현정은 회장과 ‘전통 현대맨’의 갈등이 어떤 결과를 빚어낼지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 노정익 현대상선 전 사장은 누구?
노정익 전 사장은 1977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현대그룹 기획실에서 주로 근무했다. 이어 현대그룹 경영전략팀 전무이사를 거쳐 2002년 현대상선 사장에 올라 현대그룹의 핵심 계열사 사장으로 자리매김 했다. 그야말로 전통 현대맨으로 분류되는 그는 정몽헌 회장의 최측근 중 하나로 현대그룹의 경영권 분쟁을 안정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사장은 또 지난 5년 동안 현대상선의 사장으로 일하면서 경영능력, 특히 위기관리 능력 면에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실제로 그가 사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현대상선은 유동성 위기로 살얼음을 걷고 있었다. 단기 차입금은 조 단위였고 대북사업과 관련해 온갖 조사란 조사는 다 받을 때였다.
그는 자동차 운송 부문을 매각하는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 회사를 위기에서 지켜냈다. 노 사장은 현대상선을 단기차입금이 하나도 없는 건실한 회사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한편 그는 퇴직 이후 서울대 기술지주회사 설립추진단장을 역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