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서 참패한 민주당이 ‘거여’(巨與)를 독자적으로 견제할 개헌저지선을 확보하지 못하고 제1야당으로서의 명맥을 잇는 수준의 성적표를 받아들면서 당 전체가 선거 패배의 후폭풍에 휘말려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당에 밀려 100석 개헌저지선 확보에 턱없이 못 미침으로써 정체성 논란은 물론 심각한 책임론과 당권 투쟁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당 내부는 총선결과에 대한 평가와 선거패배 책임론을 둘러싸고 내부갈등의 회오리에 휩싸일 조짐이다. 당 지도부를 이끌어온 손학규 대표는 당장악력과 리더십이 약화되면서 인책론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리더십 약화 인책론 직면
특히 앞으로 있을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권경쟁이 불꽃을 튀길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한 관계자는 “내부에서 당권 경쟁은 있을 수 있지만 특별한 대안을 발견하지 못하면서 자조와 무력감에 빠지는 상황이 오래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동안 총선국면에서 갈등을 자제해왔던 당내 세력들이 총선 평가를 놓고 일정한 시각차를 보이며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 한 것. 손학규계는 나름대로 선전했다는 평가 속에서 현 지도부 중심의 ‘단합’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참패로 해석하는 쪽은 지도부 책임론을 제기하며 당을 서둘러 새로운 체제로 개편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당권경쟁이 조기 점화된 상황에서 정체성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야당으로서 선명한 가치와 노선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총선의 최대 패인이라는 진단에서다.
구민주당계를 대표하는 박상천 대표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박 대표는 “당의 정체성과 정책노선을 선명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구 민주당계 관계자는 “도로 민주당식의 실패한 얼치기 좌파성향이 문제였다”며 “변모된 정책을 선보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구민주당측의 선공에 대해 다른 계파와 당권주자들은 “당권장악을 위한 기선잡기용”이라고 반박했다. 특히 당내 최대계파를 형성하고 있는 손학규계는 “낡은 이념적 잣대에서 한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나서 양측간에 미묘한 갈등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이 같은 정체성 논쟁은 서로 당권고지를 선점하려는 계파간 기선다툼의 성격이 강해 보인다.
때문에 6월께 개최될 것으로 예상되는 전대 경선은 총선 평가뿐만 아니라 야당으로서의 진보적 정체성 정립, 쇄신의 방향을 둘러싼 계파간 노선투쟁 형태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당의 역학구조는 손학규계, 구민주당계, 정동영계, 친노그룹, 386그룹 등이다. 이번 총선에서 전통적 동교동계는 사실상 물러났고 노무현 전 대통령계와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계, 재야파·386측은 위축됐다. 반면 손학규 대표계와 옛 민주당 계열 등이 나란히 점유율을 높였다.
이처럼 다양한 계파가 산재하는 상황에서 거대 여권을 강하게 견제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이번 전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힘의 질서’가 구축될 가능성이 높다.
당내에서는 손학규 대표의 당권 재도전 가능성도 거론되는 가운데 열린우리당 마지막 의장을 지낸 정세균 공동선대위원장, 4년전 탄핵역풍을 맞아 ‘정치적 휴지기’를 보냈던 추미애 전의원, 총선 불출마 이후 전국 지원유세를 벌였던 강금실 선대위원장, 한명숙 의원 등이 간판주자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손학규 대표는 차기 당권 포기를 선언했다. 그는 “정치인은 들고 날 때가 분명해야 한다”며 “앞으로 있을 전당대회에서 대표 경선에 나서지 않을 것이며, 당과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평당원으로서 책임과 사명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당직자는 “이대로는 정치적 미래가 없다는 게 확인된 것 아니냐”며 “선거결과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와 반성을 통해 당의 진로와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책임론 논란의 이면에는 당권경쟁이 자리잡고 있다. 총선 후 3개월 이내에 치르도록 돼있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권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계파간의 신경전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책임론 논란은 단순히 손학규 대표 등 특정 지도부에 책임을 묻는 차원을 넘어 당의 정체성과 노선을 둘러싼 당권경쟁의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당장 지도부를 상대로 직접적으로 책임을 물어 사퇴론을 제기할 명분과 동력이 충분치 않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르면 내달말 치러질 전대 경선은 당권만을 놓고 이뤄는 경쟁이 아니라 야당으로서의 노선과 이념적 좌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를 둘러싼 첨예한 당권경쟁이 예고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민주당이 내부 노선투쟁 과정에서 자칫 분열의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등 거대 여권에 맞서는 범진보진영의 재배치 움직임과 맞물려 정치권 새판짜기의 도화선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