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고갯길이 험하기는 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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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정권 이양 비화

▲ “제대로 가는 것 맞아?”이명박 대통령이 1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루고 청와대 권력을 빠르게 접수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여·야 정권교체로 인한 소통의 단절은 실무작업의 차질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대통령이 4월24일로 취임 60일을 맞았다. 정권이양의 과도기적 단계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의 위세에 ‘정권인수’란 말도 꺼내지 못하고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라는 어설픈 기구로 권력을 이양 받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라는 공식기구보다는 비선 조직을 통해 권력 이양 작업을 한 1992년 김영삼 전 대통령,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로 말 많고 탈 많은 교체기를 겪어야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 바통을 이어 받은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이전 정권에서 다음 정권으로 권력이 이양될 때는 숨겨진 뒷이야기가 쏠쏠한 법이다. 정권 초 자리를 잡고 4강 외교를 펼치는 등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 대통령. 역대 대통령 당선자의 사례를 들어 이 대통령의 정권인수 ‘비화’를 쫓았다.


권력 막강하던 전 대통령 가고 이제는 당선자가 주인공
대세론으로 지켜낸 대선승리, 인수위 파워·능력 남달라
DJ 첫 정권교체 이어 역 정권교체, 혼란까지 고스란히
이명박 대통령 정권인수까지는 거침없이, 수습은 ‘쩔쩔’

이명박 대통령이 10년만의 정권교체의 주인공이 됐다.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여당으로 변신을 꾀했고 이 대통령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로 실용정부를 준비했다.

권력인수 ‘프리패스’

이 대통령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그 파워가 남달랐다. 대세론으로 이룬 정권교체로 인한 가속도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정책들로 연결되며 ‘작은 내각’의 역할을 톡톡히 한 것. 설익은 밑그림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는 했지만 쉼 없이 일하는 역동적인 조직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이런 조직은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12월16일 제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김대중 후보를 여유있게 앞지르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정권 인수인계에 대한 전례가 없어 선거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난 뒤에야 ‘한시법’으로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 설치령이 제정돼 취임준비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대통령 취임 38일 전인 88년 1월18일이 되어서야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노 전 대통령. 그러나 시련은 끝이 아니었다. 준비위원회가 활동하던 두 달 여 동안 청와대와 많은 갈등을 겪어야 했던 것. 취임을 불과 5일 앞두고 행정부 조각 작업 및 청와대 비서진 인선작업, 보좌진 진용 구성 등이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전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에 기를 못 편 노 전 대통령에 대해 당시 관계자는 “당시만 해도 전 대통령의 권위가 엄청나게 막강했던 때”라며 “오죽하면 명칭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란 말은 사용하지도 못하고 취임준비위원회라고 했겠는가”라고 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대에 와서는 당선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김 전 대통령은 중립내각 42%의 득표율과 최초의 ‘문민정부’라는 배경에 힘입어 정권인수 때부터 마음껏 자기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지역안배로 선발된 인수위원들은 전반적으로 전문성이 떨어져 정부업무조차 제대로 파악하는 데도 벅찼다. 김 전 대통령은 인수위 대신 ‘임팩트코리아’로 알려진 동숭동팀을 통해 조각을 위한 인사파일 등 핵심사안을 처리했다.

때문에 취임식 준비에만 주력했던 인수위는 세간의 조롱거리가 됐다.

정권교체는 힘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첫 여야 정권교체를 이뤘다. 진통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청와대 안기부 군 검찰 경찰 등 구 여권체제를 형성했던 거의 모든 권력집단에 대변혁이라는 연쇄파동효과를 줬기 때문이다.

각종 공문서가 파기되고 안기부가 인수위에 보고를 거부하는 등의 후유증이 컸다. ‘청와대나 국정원에서 자료를 태우느라 연기가 자욱했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회자될 정도였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선거 전 이미 정권인수를 위해 2~3개의 팀을 만들어 외국 사례를 집중 연구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 파장이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특히 안기부의 빠른 적응은 김 전 대통령에게는 ‘알맹이’ 정보가, 청와대에는 ‘신문보도 수준보다 조금 나은 정보가 올라가는 권력이동을 보여줬다.

김 전 대통령의 정권교체에 역정권교체를 이룬 이 대통령의 사정은 어떨까. 이 대통령은 정권인수에는 ‘잡음’이 끼일 것이라는 게 청와대 안팎의 우려에 호응했다. 출범한 지 2개월에 이르도록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과 청와대가 구축해 놓은 각종 문서를 넘겨받는데 여전히 애를 먹고 있는 것.

노 전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청와대 내 문서와 기록을 인계할 준비를 할 것을 수차례 지시했고, 청와대 업무혁신비서관실과 기록관리비서관실은 방대한 기록물들을 정리, “원하면 언제든 줄 수 있다”고 밝혔다.

“인수위원회의 역할은 새 정부의 지도를 제작하는 일”이라는 견해를 밝혔던 노 전 대통령이 집권 과정에서 공들여 구축한 ‘이지원(e-知園 청와대의 모든 문서 생성과 결재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도록 한 업무관리시스템)’이라는 자신의 지도를 고스란히 전해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 사이에 소통의 문제가 발생하며 이지원의 자료는 허공으로 떠 버렸다. 이 대통령측은 노 전 대통령 측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청와대 차원의 업무보고 대신 수석비서관실별로 각각 업무를 인수하자고 요청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총무비서관실만 허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 대통령측이 이지원 가동에 실패하고 이지원에서 출력한 인쇄물이 파기됐다는 의혹이 나돌며 항간에는 “이전 (정권교체)에는 태우더니 이젠 잘라서 버린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측은 “인수인계를 위한 태스크포스(TF)까지 만들어 비서관실별로 업무 인수인계를 할 수 있도록 1년간 준비했다. 요청이 있었으면 얼마든지 협조했을 것”이라며 “이지원에서 출력한 인쇄물을 없앴다는데 그것은 파쇄지 파기가 아니다”라고 말해 구·신 정권간 언어소통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아이고, 아까운 자료”

청와대가 가장 안타까워하면 참여정부 시절 자료는 검증된 인사들의 명단이 든 ‘인사파일’. 이 대통령의 조각이 ‘검증’ 논란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만큼 공기업 기관장 등 대대적인 인사를 앞두고 노무현 정부 때 구축한 방대한 분량의 인사 파일은 탐날 수밖에 없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정권 초 인사파동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항변하며 참여정부의 인사파일을 끄집어냈다.

그는 “10년만의 정권교체로 짧은 시일 내 새로운 인물을 구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며 “이 대통령의 측근 몇몇이 인물 선정에 들어갔으나 구체적인 검증에는 많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인적 네트워크도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 일하지 않은 깨끗하고 능력있는 이를 찾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관계자들도 할 말이 많다. 그들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이명박 당선인 측에 인사 파일 제공 의사를 타진했으나 거절해 관련법에 따라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 청와대 측은 “기록관으로 넘어가면 자료 열람을 위해 국회 동의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었다”고 반박했다.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이 주도해 작성한 청와대 인사 파일은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등의 복합적 검증을 거쳐 중앙인사위원회 자료보다 효율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이 대통령은 당선 후 측근들을 ‘인수위팀’, ‘4월 총선팀’, ‘조각팀’으로 나눠 정권출범 작업에 서둘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 중 청와대행이 유력했던 인물들도 대선과 비슷하게 치러진 총선에 올인, 이 대통령의 ‘인재기근’을 더 심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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