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삼성그룹이 환골탈태를 선언했다. 파격적인 경영 쇄신안(4월22일)을 발표하고, 삼성의 미래를 위해 이건희 회장 스스로 ‘퇴진’이란 결단을 내렸다. 국내총생산(GDP)의 18%, 국내 전체 수출의 21%를 차지할 만큼 삼성을 한국경제의 큰 축으로 일궈낸 장본인인 이 회장의 퇴진은 그만큼 ‘새로 거듭 나겠다’는 삼성의 비장한 각오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사신문>이 삼성이 발표한 ‘4.22 경영 쇄신안’의 의미를 통해 그 비전을 들여다봤다.
지배구조 개선 등 파격적 '경영 쇄신안' 발표
현재의 글로벌 삼성을 일궈낸 이 회장의 퇴진은 국내외에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삼성특검을 통해 부적절한 속사정이 드러나 비난의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회장에 대한 경영자로서의 업적마저 폄하되는 것 같다’는 아쉬움이 크다.
사실 이 회장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삼성이 존재한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삼성을 누가 뭐라 하더라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 바로 그다. 삼성은 지난 1987년 이 회장이 회장직에 오르고 21년간 그야말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단적으로 1조원에 불과하던 주식의 시가총액을 현재 140조원으로 140배나 증가시켜 놨다. 삼성 내부에서조차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조(兆)단위 순이익 실현’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는 이 회장의 ‘신경영’을 통해 완성을 이뤘다. 삼성 계열사의 수출총액은 국내 전체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할 정도다.
더 높이 뛰기 위한 발판 될까
이처럼 이 회장이 삼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단지 ‘오너경영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재계에 숱한 화두를 던진 그의 경영철학이 단순한 성공기업인을 넘어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건희’ 이름 석자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통하는 하나의 글로벌 브랜드가 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회장과 핵심 경영진이 일선에서 퇴진하는 것을 두고 삼성의 ‘포스트 이건희 시대’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글로벌 기업 환경이 급변하는 위기의 순간에 선장을 잃은 삼성이 격랑의 항해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지에 대한 걱정이다.
이 회장 본인도 가장 우려한 부분일 터다. 이를 보여주듯 이 회장은 일선퇴진을 선언하면서 “20년 전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인정받는 날, 모든 영광과 결실이 삼성가족 여러분의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국민 여러분이 삼성을 세계 일류기업으로 키워 주시기 바란다”고 간곡히 호소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일 수 있다. 오히려 삼성 내부에서조차 손댈 수 없이 커져버렸던 문제점들을 이번 기회에 훌훌 털고 투명한 도덕적 기업으로 세계에 각인 될 수 있는 좋은 찬스를 맞은 셈이다. 세계 최고의 자리를 향해 다시 뛰자는 신호탄으로 보는 재계의 시각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삼성이 발표한 경영 쇄신안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 밑그림이 될 수 있을까.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발표된 ‘4.22 경영 쇄신안’은 ‘뉴 삼성’의 청사진을 담고 있다는 게 재계의 대체적인 시선이다.

삼성의 초일류화에 가장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반기업 정서를 해소하는 동시에 각 계열사별 역량을 통해 시장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투명한 경쟁력 확보가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전문경영인 체제가 오너경영인 체제보다 훨씬 나은 것이란 시장의 평가가 미약하다는 점에서 이 회장이나 핵심 경영진의 퇴진이 향후 경영에 있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대목. 삼성은 오는 7월1일부터 새로운 경영 체제를 갖추기로 하고, 이 회장의 공백은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대신하기로 했다.
이번 삼성 사태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던 지배구조 문제에 대한 개선책도 미래를 향한 발걸음엔 긍정적일 수밖에 없다. 당장 지주회사 전환은 어렵지만 순환출자 구조는 향후 4~5년 내에 해소하겠다는 게 주요 골자다.
사실 삼성으로서는 에버랜드를 정점으로 한 순환출자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선포가 이번 삼성 사태를 불러온 근본적인 이유인 이재용 전무의 경영권 승계를 원점으로 돌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들의 그룹 장악력이 약화되는 것까지 감수하겠다는 이 회장의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만큼 파격적인 혁신을 몸으로 보여주면서 삼성의 초일류 행진에 힘을 싣겠다는 의지인 것. 이학수 부회장 “삼성카드가 보유하고 있는 삼성에버랜드 지분(25.64%)을 4~5년 내에 매각 하겠다”고 밝혔다.
이재용 전무은 해외 사업장에 머물며 백의종군의 자세로 능력을 입증한 뒤 당당하게 경영승계를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기실 해체가 담는 의미는?
‘재계의 청와대’, ‘삼성의 심장부’ 등으로 불리는 ‘전략기획실’(전기실)의 해체는 아마도 가장 어려운 선

아무튼 삼성은 앞으로 ‘사장단협의회’를 중심축으로 경영 전반을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이 회장과 전기실, 각 계열사 사장단이 그동안 삼성을 이끈 삼각편대였다면 앞으로는 각 계열사 사장들로 사장단협의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경영현안을 조율하겠다는 것이다.
이학수 부회장은 “협의회는 계열사별 전문경영인들의 독자 경영체제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삼성은 이번 특검 수사 결과에서 나타난 차명계좌의 돈을 유익한 곳에 사용한다고 밝혔다. 이학수 부회장은 경영 쇄신안을 발표하던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이 특검에서 조세 포탈 문제가 제기된 차명계좌는 세금을 낸 뒤 나머지 금액을 유익한 일에 쓰는 방안을 찾아보자고 했다”고 밝혔다. 용도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문제가 된 만큼 정당하게 세금을 내고 남는 금액에 대해 본인이나 가족을 위해 쓰지는 않겠다는 설명이다.
다만 2조원이 넘는 삼성생명 차명주식의 경우 세금을 포탈한 것이 아니고, 더구나 경영권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어서 대상에서는 제외된다.
▶ 삼성그룹 ‘경영 쇄신안’ 10대 항목
이건희 회장과 이학수 부회장 등 삼성그룹 수뇌부는 지난 4월22일 오전 태평로 삼성 본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10가지 항목의 경영 쇄신안을 발표했다. 다음은 주요 내용이다.
① 이건희 회장은 경영에서 퇴진한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의 대표이사 회장과 등기이사, 문화재단 이사장 등 삼성과 관련한 일체의 직에서 사임 절차를 밟는다.
② 이건희 회장의 퇴진과 함께 홍라희 관장도 리움미술관 관장과 문화재단 이사직을 사임한다.
③ 이재용 전무는 삼성전자의 CCO(고객총괄책임자)를 사임한 후 주로 여건이 열악한 해외 사업장에서 임직원들과 함께 현장을 체험하고 시장개척 업무를 할 것이다.
④ 전략기획실은 해체한다. 그동안 전략기획실은 대규모의 투자가 수반되는 그룹 차원의 전략사업을 육성하고, 각 계열사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지원해 왔다. 하지만 이제 각사의 독자적인 경영역량이 확보되었고, 사회적으로도 그룹 경영체제에 대해 일부 이견이 있는 점을 감안해 해체를 결정했다.
⑤ 김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은 잡무처리가 끝난 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⑥ 특검에서 조세포탈 문제가 된 차명계좌는 이건희 회장 실명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누락된 세금 등을 모두 납부한 후 남는 돈을 유익한 일에 쓸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기로 했다.
⑦ 삼성생명, 삼성증권, 삼성화재 등 금융사에 대해서는 경영 투명성을 더 높이고 정도경영, 윤리경영을 실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강구한다. 삼성화재 황태선 사장, 삼성증권 배호원 사장은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
⑧ 사외이사들이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삼성과 직무상으로 연관이 있는 인사들은 사외이사로 선임하지 않겠다.
⑨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데는 약 20조원이 필요하고, 그룹 전체의 경영권이 위협받는 문제가 있으니 시간을 두고 검토하겠다. 다만 순환출자 문제는 삼성카드가 보유한 에버랜드 주식을 4~5년 내에 매각하는 등 계속 검토하겠다.
⑩ 이건희 회장의 퇴진 후에 대외적으로 삼성을 대표할 일이 있을 경우 삼성생명의 이수빈 회장이 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또 사장단회의를 실무 지원하고 대외적으로 삼성그룹의 창구와 대변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행정 서비스를 전담하는 업무지원실을 임원 2~3명 정도로 사장단협의회 산하에 설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