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따라잡기] 어느 탈북자의 국가 상대 소송 [내막]
[이슈따라잡기] 어느 탈북자의 국가 상대 소송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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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에 있는 내 가족이 사라졌다

“북에 남은 가족들 위해 정보공개 안 한다는 약속 받았지만…”
귀순 다음날 여러 언론을 통해 이씨 가족들의 신상명세 공개돼
“실종가족 탈북 보복으로 처형 혹은 정치범교화소 끌려간 것으로 추정”
악명 높은 정치범교화소,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는 경우 거의 없어


지난 2006년 3월 탈북 후 국내로 망명한 일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내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이들 가족이 망명 당시 정부당국이 ‘탈북 사실을 비밀로 해주겠다’는 약속을 어겨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행방불명 됐다는 것.

소송을 낸 이모(39)씨와 김모(28)씨 등은 “국가가 탈북 사실을 언론에 알려 가족들이 실종됐다”면서 국가를 상대로 억대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상태다. 이씨와 김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이 탈북할 당시 북한에 남은 가족 23명이 얼마 전 실종됐다.

이들은 “(실종된 가족이) 탈북에 따른 보복으로 처형당하거나 정치범교화소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실종된 가족 1명 당 5000만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전했다. <시사신문>은 이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소장을 입수, 소송의 내막을 들여다봤다.



이씨 등은 “최근 북한에서 온 탈북 브로커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북한에 있는 부모·형제·조카 등 23명의 가족들이 행방불명됐다”며 “탈북에 따른 보복으로 처형당하거나 정치범교화소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며 통곡했다.


이들은 “탈북 과정에서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위험이 미칠 것을 걱정해 군과 국정원 등 정부 관계자들에게 탈북 사실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정보 당국의 합동신문이 끝난 직후 언론을 통해 일행들의 나이와 탈북 경로가 명시된 기사가 보도됐고, 또 다른 언론에서는 내가 인민위원회 지도원으로 활동했다는 등 세부적인 인적사항까지 공개됐다”고 주장했다.


이씨 등은 이어 “가족들이 행방불명되게 한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에 대해 국가는 배상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에만 얘기 했는데…


이씨 등은 귀순 전날인 지난 2006년 3월17일 “오후조업을 나간다”며 고성군 통천항을 출발해 18일 23시경 강원도 고성군을 통해 귀순했다. 당시 이씨는 어린 두 아들과 부인, 자신의 지인 등과 함께 국내로 들어왔다.


귀순 후 이들은 다음날(19일) 새벽 1시 30분경부터 4시 30분까지 약 3시간 가량을 고성군에 위치한 22사단 부관부 합동신문반에서 신문을 받았다. 이씨는 “당시 합동신문반은 국정원, 22시단, 해군 108전대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신문 당시 합동신문반에게 “외부에 인적사항이 공개되면 곤란한 일이 발생한다고 주지시켰고 합동신문반에서도 ‘귀순가족들이 군사구역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군사비밀로 취급, 비밀을 보장한다’고 약속했다”고 전했다.

이씨는 “굳게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이런 식의 약속을 15차례나 했다”면서 “이후 우리는 약속을 믿고 사진촬영에도 응하고 신분과 귀순 경위 등에 대해 1차조사를 받고 서울로 이동했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의 굳은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합동신문이 끝난 직후부터 일부 언론에 의해 이들의 신상명세가 보도된 것. 실제 지난 2006년 3월19일 오전 5시 모 언론은 ‘북한 주민 5명을 태운 소형 전마선 한척이 내려왔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언론은 또 같은 날 10시경엔 ‘이모(37), 박모(34)씨 부부와 이씨의 2살, 8살된 아들 등 일가족과 이씨의 지인 김모(26)씨’라고 명시, 탈출경로에 대해서도 자세히 묘사한 바 있다.


또 다른 언론은 ‘귀순한 이씨는 북한에서 인민위원회 지도원으로 활동했고, 김씨는 무역선 선원으로 일을 했다’고 보도해 이들의 인적사항을 명확히 특정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공개하기도 했다.


이씨는 “그 당시 귀순한 사실과 직업 등 신상명세 그리고 탈북 경로를 말한 곳은 합동신문반에서 신문을 받을 때를 제외하곤 어느 곳에서도 진술한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런데 이 사실들이 언론을 통해서 공개됐다는 것은 합동신문 당시 합동신문과 관련된 국가공무원이 외부에 공개 했다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해당 기사가 작성되기까지 소속 경찰 또는 공무원들 중 일부가 귀순 사실 등을 외부에 공개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했다. 실제 당시 수사과정에서 인천지방경찰청 공보실에서 모 언론사 사무실로 송고되는 상황보고서에 이들 가족의 귀순사실이 기재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해당 기자 역시 ‘상황보고서에 기재된 정보를 입수한 후 당시 현장에 있던 경찰에 전화를 걸어 확인한 후 기사를 작성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국은 이들의 보도가 나간 이후 적극성을 띄고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했다는 것. 강원지방경찰청은 최초보도 이후 각 언론사로부터 확인전화가 쇄도하자 모든 내용을 언론에 공개했다.


원산시 인민위원회 지도원이었던 이씨는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의 한 사람으로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 망명을 시도했지만, 영국 이민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고 다시 돌아왔다”며 “가족들도 사라진 마당에 한국 정부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이에 대해 “당국이 우리의 신상정보를 누출하지 않기로 했던 약속을 어긴 결과 내 가족들이 해를 입었다”면서 “이번 소송은 이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한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국정원 조사를 받을 당시 수사당국으로부터 열다섯 차례나 신상정보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다짐받았었다”며 “탈북한 이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북한에 남은 가족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고 말했다. 이 씨는 또 귀순 당시 국정원의 강압적인 조사 과정에도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책임회피 ‘급급’


그는 얼마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에 대한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내가 비공개로 입국한 이상 이것이 알려질 경우, 북한의 혈육들이 다 위험하다. 정부 차원에서 담당관들이 우리가 더 잘 알고 있으니, 국제법과 국내법대로 철저하게 보호하겠다고 열 다섯 차례나 확인했다. 언론에 보도가 난 사실을 알고 난 후, 유엔이나 미국대사관에 보내달라고 했더니 한국 정부에서 한다는 말이 뭔 줄 아는가. ‘(우리말을 안 들으면) 강제 북송하겠다’고 했다”.


이후 이 씨는 국정원과 국방부 등 한국의 관련 당국들을 상대로 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을 해달라는 내용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그 어느 곳도 시원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던 것.


이씨는 “이곳저곳 탄원서를 쓰고 정부기관을 직접 찾아다니며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답답하기만 했다”며 “한국 정부는 탈북자의 인권침해에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국가인권위원회 측은 “탈북자 신상정보 공개는 인권침해 행위로 규정되므로 재발 방지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권고안을 유관기관들에게 내렸다”고 밝혔다.


국가인권위원회 측 한 관계자는 “당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정보공개에 대한 책임이 있는 국방부 장관과 서울경찰청장, 강원도 지방경찰청장에게 경고 조치를 한 뒤,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재발방지를 위한 권고 조치를 내렸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에 있는 이씨 가족들의 생사확인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다”고 덧붙였다.


한국 정부의 안일한 대처에 불만을 느낀 이씨는 결국 영국 망명길을 택했다. 영국 정부에 망명 신청을 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영국 정부로부터 첫 번째 망명 신청이 거절당한 후, 유럽연합 인권위원회 측으로부터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갑작스레 영국 이민국으로부터 강제추방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씨는 “영국에서 고생 많이 했다”면서 “강제로 한국까지 호송됐다”고 전했다. 새벽에 영국경호원들이 들이닥쳐 강제송환 했다는 얘기였다.


국가인권위 측은 “이 씨의 경우 국적이 대한민국이다 보니, 난민 지위가 인정되지 않아, 영국 정부에서 이민국을 통해 한국으로 추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일각에선 ‘너무 소극적인 대처였다’는 시각도 나온다.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 측은 “정치적 난민은 굳이 정치적인 핍박이 아니더라도 다른 이유로 난민 개념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 정부는 너무 소극적인 시각으로 난민 문제에 접근한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또 “자신이 원치 않는 곳으로 보낸다는 것은 난민에 대한 잘못된 처사”라면서 “난민에 대한 비밀보장은 기본적인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이 노출됐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사라진 가족들 교화소에?


북한인권시민연합 측도 “동해나 서해상으로 탈북한 탈북자들의 경우, 신상정보가 언론에 유출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지적한 뒤,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정보유출의 경우 북에 남겨진 가족의 신변에 위험이 된다는 점을 감안해,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씨의 사라진 가족이 정치범교화소에 수용돼 있을 경우 문제는 심각하다. 북한의 정치범교화소는 악명이 높기로 유명하기 때문. 실제 그 곳에 들어가면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북한에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규정을 위반하게 되면 가게 되는 곳으로는 집결소, 노동교양소, 교화소, 관리소가 있다.


집결소는 비교적 가벼운 규정이나 규칙을 위반했을 때 인민보안성(경찰)에 넘겨지기 전 잠시 대기하는 곳이다. 집결소 신세를 지는 사례로는 증명서 없이 소속 직장을 무단 이탈했거나 통행증 없이 열차에 탑승했을 경우가 주류를 이룬다. 대표적인 집결소로는 평양 외곽의 철도교통 요충지인 간리와 평안남도 신성천의 집결소가 잘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는 현지의 형편에 따라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개월 가량 머물기도 한다. 대기하는 동안에는 각종 육체노동을 하면서 사상개조를 받게 된다. 집결소에 머문 기간은 전과기록에 등재되지 않는다.


범죄자가 재판을 받게 되면 노동교양소나 교화소에 가게 된다. 교양소는 단순폭행이나 절도, 명예훼손 등으로 2년 미만의 형을 선고받았을 때 가는 곳이다. 사안에 따라서는 정식 재판 없이 인민보안성이 즉결심판을 통해 경범죄자들을 교양소로 보내기도 한다. 최근에는 배고픔을 못 견뎌 국경을 넘은 단순 탈북자도 노동교양소로 보내지는 것으로 전해진다.


교양소는 수형기간 1년짜리와 2년짜리 두 가지로 나뉘는데 전자는 흔히 22호 교양소로 불리며, 후자는 66호 교양소와 88호 교양소로 불린다. 22호 교양소는 함북 어랑, 66호 교양소는 평북 천마, 88호 교양소는 강원도 원산에 있는 것이 유명하다. 교양소에서는 심한 육체노동을 통한 사상단련을 받는데 이 때문에 노동단련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교화소는 2년 이상의 형량을 선고받은 수형자들이 가는 곳으로 우리의 교도소와 같다. 교화소도 일반 교화소와 정치범교화소 두 가지가 있다. 교양소와 일반 교화소가 모두 인민보안성 7국(교화국) 관리 대상인데 반해 정치범교화소는 국가안전보위부가 관리한다.

정치범교화소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함북 청진, 평남 개천, 평양 승호리의 교화소가 악명이 높다. 승호리교화소는 외부에 공개되면서 몇 년 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sr35@sisa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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