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십 년 격동과 고난, 곡절 많은 삶을 살아온 어머니의 ‘노래’
삶을 지탱해온 힘의 원천이자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
원고 한 장 십만 원이라는 아들의 말에 자기 대서방 노릇이나 하라며 한껏 이바구를 늘어놓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연분홍 치마를 봄바람에 휘날리며 그네를 타고, 일 년에 두 번 수녀 딸들과의 만남을 위해 재봉틀을 매만지고, 탁주 두어 사발에 상기된 얼굴로 몇 번이나 발길을 돌리려 했으나 차마 돌리지 못했다는 사연을 풀어놓으며, 자식들에게 용돈을 의지하게 된 이후로는 애절한 노래를 흥얼거리다 마지못해 아쉬운 소리 한마디 내뱉는 우리 어머니들의 삶.
지난 수십 년간 이 땅의 어머니들은 격동과 고난의 시기, 곡절 많은 삶을 살아오면서 저마다 가슴속 깊은 곳에 세상과 소통하는 또 다른 언어, 노래를 간직해왔다.
열아홉 살 새색시의 들썩이던 마음을 다잡아주었던 <발길을 돌리려고>,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설움을 시원스레 날려 보냈던 <섬마을 선생님>, 임의 소식을 실은 파랑마차를 기다리며 위안을 삼던 <진달래시첩>, 애달픈 내 맘도 모르고 엄마 홀로 부르던 <동무 생각>, 한 땀 한 땀 누비이불처럼 삶을 바느질할 때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동백아가씨>, 몸 안에 꿈틀거리는 자유에 대한 열망을 달래주었던 애창가요 선집, 그리고 아들과 함께 나선 산책길에서 낮은 음으로 따라 부르던 올드 팝송들까지….
푸르스름한 한복의 허리께를 허리띠로 졸라매고 봄풀 파릇하게 돋아난 강가의 밭둑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해지는 저녁이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서서 청아한 목소리로 긴 하루를 마무리하며, 울화가 치밀 때면 생생한 리듬과 장담에 맞춰 오줌줄기처럼 시원하게 잔소리를 뿜어내기도 하고, 기분이 좋을 때면 허리를 흔들흔들 신명나게 춤을 추며 노래 한 자락을 뽑아내고, 심지어 투병 생활을 하는 중에 기운이 날 때면 음정·박자 무시하고 노랫말을 낭송하곤 했다. 이처럼 노래는 어머니의 삶을 지탱해온 힘의 원천이자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역사이기도 했다.
이해인, 오정희, 함정임, 황주리, 이윤택, 이홍렬 등 우리나라 각계 명사 25인은 ‘어머니의 노래’를 통해 어머니와 그 노래에 얽힌 사연을 차분하게 담아냈다. 때문에 ‘어머니의 노래’는 고통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살아 있는 텍스트와 깊은 울림을 지닌 옛 노래의 감미로운 달콤한 매력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지난해 9월 어머니를 여읜 이해인 수녀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애절하게 풀어놓았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남편이 행방불명되고, 홀로 4남매 뒷바라지를 하며 임을 기다리는 기약 없는 세월을 보냈던 어머니는 <진달래시첩>을 부르며 가슴 절절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세월을 대신했다.
이해인 수녀는 어머니를 추억하며, 어머니는 하늘 소풍을 떠나서도 자식들에게 “가장 포근한 집이자 아름다운 노래이며 한결같은 기도”라고 털어놓는다.
소설가 함정임은 어머니의 노래를 들으며 막연한 슬픔과 동경, 인생의 비릿하고 달콤한 감정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화가 황주리는 지나간 세월 흥얼거렸던 노랫말을 되새김질하며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자신의 애창곡이 되어버린 사연을 이야기한다.
지나던 사람들이 싱글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두 바퀴 맴을 돌며 춤추듯 노래를 부르는 시어머니에 대해 쓴 소설가 서하진, 아쉬운 말 한마디 하지를 못해 아침부터 강판에 감자를 갈다 말고 애절한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작가 이명랑, 부부싸움을 할 때면 어김없이 가출을 감행한 후 한밤중에 창문을 두드리며 나지막이 아들 이름을 속삭이던 사연을 엮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 등의 글은 과거 가난하고 고단했던 삶의 이면에 훈훈한 정과 해학 넘치는 웃음을 안겨주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끼이를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써어지 안는 거어쓴 미련인가 아씨움인가아…… 시어머니가 운을 떼면 아들들이 뒤이어 합창을 한다. 가씀에 이 가쓰으메 심어둔 그 싸아랑이 이다지도 깊을 줄을 나안 정말 모올랐었네에에에 아아아아 아아아아 진정 난 몰라았었네에에에…… 중간중간 시어머니는 춤추듯 한두 바퀴 맴을 돌고 사위와 딸들이 박수를 치며 장단을 맞추노라면 지나던 사람들이 싱글거리며 쳐다보지만 시어머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어머님 오늘 그 노래 열 번은 부르셨어요. 그 노래가 그리 좋으세요? 어머님은 눈을 뜨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셨다. 노래 안 좋으나, 가사도 그렇고. 말씀을 길게 하는 양반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나는 또 물었다. 그래도요, 어머님,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 같잖아요. 그래 들리드나, 하신 시어머니가 피식 웃음을 흘리셨다. 내가 야야, 몇 번이고 발길을 돌리라꼬, 돌릴라꼬, 카다가 못 돌렸잖나…… 열아홉에 시집가주고…… 옛날에 말이다……”
-‘발길을 돌리려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