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원 늘어 필요인력 급증, 대거 낙선으로 일자리 줄어
새로운 일자리 찾아 모든 인맥 총동원 생존경쟁 돌입
한나라-우수한 인재 몰려 ‘골라 뽑기’ 고심
민주당-대거 낙선 후유증 일자리 찾기 분주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 중앙정보부의 슬로건이다. 그런데 아직도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선자와 함께 여의도에 입성하고 낙선자와 운명을 같이 하는 국회의원 보좌진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5월30일부터 시작되는 18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의원회관의 상당수 의원들의 방은 문이 닫혀 있다. 당선자들은 당선사례 때문에, 낙선자는 낙선사례 때문에 지역에 머물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문이 열려 있는 의원실도 대부분 직원 1~2명만 자리를 지키고 있어 한산한 분위기다.
떠나고 남고 ‘잔인한 5월’
낙선한 국회의원들은 물론 보좌진들은 일할 의욕을 잃은 채 새로운 ‘주군(主君)’을 찾거나 일자리를 구하느라 여념이 없는 상황이다. 새로 금배지를 단 의원들은 보좌진을 꾸려야 하며, 낙선한 의원들의 보좌진은 다른 자리를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보좌진을 하다가 그만두면 정치권 이외에 딱히 갈 곳이 없어 생존경쟁이 치열하다.
서울지역에서 낙선한 한 의원의 보좌관은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지만 민주당 쪽에서 당선한 의원이 적어서 여의치 않다”며 “박사학위는 있지만 최근 써놓은 연구 실적(논문)이 없기 때문에 민간연구소로 가기 힘든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당선한 의원의 보좌진은 편하게 18대 국회를 준비하고 있다.
여의도에 새로 진입한 예비의원 역시 대부분 보좌진 구성을 마친 상태다. 다만 18대 원구성이 되지 않아 상임위를 아직 배정받지 않았기 때문에 정책전문가 한두 자리를 비워놓은 상황이라 이들은 하루아침에 갈 곳 없는 신세가 됐다.
비례대표를 보좌하고 있는 한 보좌진은 한숨을 내쉬며 “이제 의원 임기가 끝나면 뭐 할지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의원 임기가 끝나면 할 일이 없어지니 막막하단 얘기였다. 그는 “더더욱 우리 의원은 지역구에 출마하는 것도 포기했다”면서 “그러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대다수의 보좌관들은 의원 임기가 끝나기 전에 줄대기에 바빠진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은 새로운 직장을 찾거나 다른 의원실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인맥을 총동원한다.
하지만 다른 의원실에 입성하는 것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의원들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일을 도맡아 하는 그들이기에 의원을 향한 충성도는 보좌관이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보좌진을 빗대 여의도 정가에선 ‘하루살이’, ‘상머슴’. ‘따가리’(軍에서 부하병사를 일컫는 비속어)’ 등으로 부른다. 보좌관이라는 직업이 그만큼 힘든 3D 업종이라는 뜻이다. ‘리틀 금배지’라고 불리며 한때 ‘대접(?)’받으며 잘나갔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 일이다.
보좌진은 과거 상당수가 선거운동 과정에서 공을 세운 측근들이 ‘논공행상’ 차원에서 보좌관에 임명되곤 했지만 이제는 정책 전문성 등 웬만한 석·박사 학위가 없으면 명함도 내밀기 어려울 만큼 전문직종이다.
‘얼굴 없는 의원’ 역할
흔히 보좌진은 정책형과 정무형으로 나뉜다. 그러나 의원 대부분은 멀티 플레이어를 원한다. 의원이 추진코자 하는 정책이며 법안 마련, 소속된 상임위와 정당 활동, 민원 처리까지 ‘1인 다역’이 모두 보좌진 몫이다.
보좌진은 의원 개인 이미지 관리며 정치적 입지까지 고민해야 한다. 말 그대로 ‘종합예술가’가 돼야 한다. 국회의원 의정 활동의 성공 여부가 이제 보좌진 손에 달려 있다.
보좌진을 ‘얼굴 없는 의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전에 보좌진 하면 ‘가방 모찌’라는 말을 쉽게 떠올렸다. 이제는 달라졌다. 의원이 오히려 ‘얼굴 마담’으로 변하고 있는 추세다.
현재 국회의원 한 명당 할당된 보좌진은 여섯 명이다. 4급 두 명, 5급·6급·7급·9급 각 한 명씩이다. 여기에 인턴 두 명을 포함하면, 총 여덟 명의 보좌진을 국가 예산으로 채용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 4급과 5급 보좌진은 국회의장이, 6·7·9급 보좌진은 국회사무총장이 임명한다. 하지만 실제 임명권은 의원이 쥐고 있다. 의원의 마음에 따라 보좌진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보좌진들은 스스로를 ‘고임금 비정규직’이라고 부른다.
국회 보좌진은 ‘국회의원 수당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채용된다. 임금은 공무원 보수 규정에 따라 지급받는다. 4급 보좌관은 본봉 292만200원(4급21호봉), 5급 비서관은 본봉 271만8800원(5급24호봉)을 받는다. 여기에 수당이 붙는다. 기본수당과 가족수당·직급비 등 각종 수당이 붙으면 4급 보좌관 연봉은 평균 6000만원, 5급 비서관 연봉은 평균 5000만원선이다.
국회의원의 국회 재입성 여부에 따라 이들의 운명은 달라진다. 이들이 의원실에 근속할 수 있는 기간은 단 4년. 경우에 따라선 이보다 더 짧아질 수도 있는 실정이다. 근무 도중 권고사직을 당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들의 일자리를 보장해 주는 사람은 없다. 의원의 수명이 끝나는 순간, 이들의 수명 또한 끝이 나게 마련이다. 때문에 각자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여당은 구인난 야당은 구직난
현재 국회 136석에서 81석으로 의석수가 대폭 줄어든 통합민주당의 구직난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국회의원 1인당 보좌관과 비서관 등 인턴직원을 포함한 보좌진은 모두 8명.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낙선한 55명의 의원과 함께 한 보좌진 440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여기에 중앙당 역시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고려하면 모두 5600명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때문에 최근 민주당 비례대표 초선 당선자 측의 5급 비서관 공채에는 1명 모집에 20여 명이 지원자가 몰리기도 했다.
민주당 낙선 의원의 한 보좌진은 “한나라당 낙선 의원 보좌진은 이미 옮길 방(의원실)이 대부분 결정돼 있는 반면 민주당은 매우 힘들다”면서 “당적을 옮기면서 국회에 머무는 보좌진도 더러 있지만 상당수는 당장 살 길이 막막한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인천의 낙선의원 보좌진은 “한나라당쪽 아는 의원이 있으면 보좌직원 채용 계획이 있는지 확인을 부탁한다. 모 의원실의 채용 소식란 조회건수가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고 있어 서류를 내놓고도 불안하기만 하다”며 국회 내 오랜 경력에도 불구하고 새 일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며 하소연했다.
또 다른 보좌진은 “한나라당에서는 민주당 의원을 모시던 보좌직원을 채용하지 않겠다는 불문율 같은 것이 있다. 16대까지는 보좌직원들이 여야를 떠나 자유롭게 의원실에 채용이 됐는데 지난 2003년 노무현대통령 탄핵 소용돌이 속에서 옛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 출신은 누구도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하면서 교류가 차단됐다”고 한숨을 쉬었다.
반면 한나라당은 인재 영입에 한창이다. 111석에서 153석으로 의석수를 늘린 한나라당은 유능한 보좌진을 영입하느라 부심중이다. 각종 인맥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인재를 찾는가 하면 국회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보좌관이나 비서관, 인턴 직원들을 모집하고 있다.
실제 4·9총선 이후 국회 홈페이지에 오른 보좌진 채용공고 27건 중 통합민주당은 8건에 불과한 반면 한나라당은 18건을 차지했다. 이들 중 박사학위 소지자가 4명에 이르며 대기업 연구원(2명)과 석사학위자(10명)가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의 한 초선의원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마자 지인들로부터 많은 보좌진을 추천 받았다”며 “이제는 전화 받기조차 꺼려진다”고 토로했다.
집권 여당 보좌진 특권

정의화 의원실 정원동 보좌관은 기획재정부장관 정책보좌관으로, 남경필 의원실 강철 보좌관은 외교통상부장관 정책보좌관으로, 고경화 의원실 윤상경 보좌관은 보건복지가족부장관 정책보좌관으로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통합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옮기는 보좌진도 많았다. 한나라당보좌관협의회(한보협) 관계자는 “이번 총선을 통해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자리를 옮긴 보좌관과 비서관은 줄잡아 50명 선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이와 관련 한 보좌진은 “한나라당측에서 제의가 있었으나 정치 도의상 어떻게 말을 바꿔 탈 수 있느냐”면서 “퇴직금을 정리한 후 외국에서 공부를 더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일부 보좌진들은 뒤늦게 기업체 취직에 나서거나 외국 유학 준비, 석·박사 과정을 위한 대학원 입시 준비에 한창이다.
여야를 넘나드는 보좌진들의 행보에 대한 시각은 크게 엇갈린다. 정치적 소신이 없다는 비난과 능력있는 보좌진이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가장으로서의 현실적인 불가피성을 얘기하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4년마다 반복되는 국회의원 보좌진에 대한 구인 구직 문제 때문에 국회 사무처를 통한 보좌진 인력은행제도 등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보좌관 출신의 한 인사는 “보좌관 풀제를 통해 인재를 안정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정당간 이해관계나 각자의 이념이 달라 실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렇듯 국회의원 보좌진은 소속 의원이 선거에서 탈락할 경우 새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등 이직률 높고, 정년 보장 안된다. 이 경우 다른 의원의 보좌진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소속 당사에서 일하기도 한다. 때문에 보좌진 직업은 불안하고 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의원 보좌진은 ‘국회의원의 손과 발’노릇을 하는 직업으로 신문 기사를 검색하는 일부터 의원이 속한 상임위와 관련한 각종 질의와 자료를 준비하고 의원이 속한 단체활동을 보좌하는 등의 일을 한다.
이들은 비록 별정직이기는 하지만 임용기간 동안은 공무원에 준하는 신분과 대우를 보장받으면서 자신이 소속된 국회의원을 대신해 정부기관에 자료를 요청하고, 그 과정에서 국가기밀에 속하는 고급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의원이 속한 위원회에 따라 만나는 사람도 달라진다. 그래서 더 매력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서울의 한 비서관은 “미래가 불투명하더라도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사회를 변화하는데 보탬이 되고 많은 정보를 얻고 인맥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며 직업의 불안정성을 감수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단순히 의원 비서관으로 계속 살 수는 없다”며 “자신의 앞날을 정치에 걸어보겠다는 확고한 뜻이 있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직업”이라고 말했다.
한편 한나라당 국회의원 당선자가 30일 구인광고를 통해 보좌관 공모에 나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학용 당선자(경기 안성)는 한 중앙일간지에 4급 보좌관 2명과 인턴 2명 등 모두 4명의 보좌진을 선발한다는 내용의 공개모집 광고를 냈다.
김 당선자는 보좌관의 지원자격과 관련, 나이·경력·학력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면서 ‘영어 등 외국어에 능숙한 사람’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특히 보좌진 경력이 있고 국가관과 책임의식이 투철한 사람은 우대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이처럼 언론매체에 광고를 내 보좌진을 공채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지난 16대 국회 당시 새천년민주당 김민석 의원이 이 같은 방식으로 보좌관을 채용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의원 비서관과 경기도의원 등을 지낸 김 당선자는 지난 11일 18대 국회의원 당선자 중 처음으로 국회 등록을 마치고 ‘금배지’를 받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