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초단체장 지역구에 백중우세 점쳤던 한나라당 ‘쓴 패배’
‘촛불 민심’ 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민노당으로 돌아서
한 “예상했던 결과” 자성론에 ‘쇠고기 재협상’ 내부 목소리
민주당 “쇠고기 재협상, 대운하 저지…제대로 된 야당 역할”
기초단체장을 뽑는 6·4 재보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의 우세가 예상됐다. 9개 기초단체장 선거 중 서울 강동, 인천 서구, 경기 포천, 경북 남해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들의 백중우세로 예상됐으며 경북 청도, 경남 거창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들의 우세가 점쳐졌다.
전남 영광에서 통합민주당 정기호 후보가 우세를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강원 고성에서는 민주당 신명선 후보와 무소속 남유현 후보가 경함을 벌이고 대구 서구에서는 무소속 서중현, 강성호, 손창민, 임은경 후보의 초경합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같은 판도가 변해가기 시작했다.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에 반발한 민심의 ‘촛불’이 선거 지형도를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민심의 나침반 어디로?
6·4 재보선은 한나라당의 참패로 끝났다. 뚜껑을 연 선거는 예상대로 낮은 투표율을 보였다. 그러나 이 낮은 투표 참여에도 민심은 정확히 반영됐다.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던 한나라당에 ‘심판’을 가한 것이다.
기초단체장 선거 결과 9곳 중 6곳에 공천자를 낸 한나라당은 경북 청도를 제외한 수도권과 영남 전 지역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나마 1승을 거둔 경북 청도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핵심측근이자 지난 총선에서 전국 최고득표를 한 최경환 의원의 지역구다. 이를 감안하면 이명박 대통령측이 장악한 한나라당은 전패를 한 것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여야 모두 이번 재·보궐 선거 승패를 결정짓는 최대 승부처로 꼽았던 서울 강동, 인천 서구, 경기 포천 등 수도권 기초단체장 선거 3곳 중 서울 강동구청장과 인천 서구청장 선거에선 민주당 후보가 승리, 민의가 향하는 방향을 가리켰다. 경기 포천시장에는 한나라당 후보의 추격을 따돌리고 무소속 서장원 후보가 당선됐다.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29개 선거구 중 부산지역 3곳을 포함, 7개 선거구에서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쳤다. 반면 민주당은 수도권 7곳을 포함해 14개 선거구에서 승리했고 자유선진당은 2곳, 민주노동당은 한 곳에서 당선자를 냈다.
또 기초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14개 선거구 중 경남 김해 한 곳에서만 당선자를 낼 수 있었다.
한나라당 ‘으메 기 죽어’
이번 선거로 한나라당은 혹독한 수업료를 치렀다. 민심에 반하면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패배는 비단 숫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나라당은 2004년 17대 총선 이후 재보선에서 단 한 번도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게 져본 적이 없다. 때문에 이번 패배는 숫자 그 이상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이 대통령의 지지층이 밀집해 있는 수도권에서 기초단체장 당선에 실패했다는 것은 이 대통령의 지지층이 무너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한나라당은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받들지 못해 나타난 민심을 겸허히 수용한다”며 국민의 질책을 받아들였다.
당 내에서는 자성론이 빗발치고 있다. 김학원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한나라당이 이길 가능성 큰 서울·영남서도 대부분이 패배했는데 우리가 안방, 윗방, 아랫목과 윗목이 없을 정도로 참패를 당한 의미를 곰곰이 씹어봐야 할 것”이라며 자성을 촉구했다.
‘쇠고기 재협상’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박순자 의원은 쇠고기 사태 수습 방안과 관련, “적절한 시기에는 결국 재협상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며 ‘재협상’을 주장했다. 그는 “잘못된 점이 있다면 어느 시기에 가서는 솔직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땜질식 처방을 한다면 정부 정책 당국자를 문책하는 것도 해결 방법”이라고 말했다.
정병국 의원도 “여당이라고 정부와 입장이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야당의 재협상 촉구 결의안을 받겠다고 한 만큼 한나라당의 당론도 재협상으로 봐야 한다”며 “국회 차원의 요구를 지렛대 삼아 정부가 재협상에 나서면 된다”고 주장했다.
6·4 재보궐 선거를 지원했던 나경원 의원도 ‘자성론’과 함께 “민간 자율규제가 구속력이 없다면 동의하기 어렵다. 용어가 뭐든 내용상으로는 재협상의 수준으로 가야 한다”고 밝혔다. “국민 불안을 확실히 해소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한나라당 지지율이 다소 빠졌지만 민주당 지지율 또한 올라가지 않고 있다”면서 “장외투쟁을 벗어나 우리와 같은 자세로 재무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야권 ‘으메 기 살어’

실제 3일과 4일 민심동향을 살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나라당 지지율이 20%대로 하락, 27.2%로 통합민주당으로부터 오차범위내에서 추격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재보궐 선거에서 약진한 통합민주당은 25.1%로 한나라당 턱밑까지 다가섰다.
손학규 대표는 “국민 건강을 외면하고, 국민 주권을 가벼이 여기며, 또 서민생활을 외면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라며 “이 뜻을 받아들여 쇠고기 재협상을 반드시 관철하고, 한반도 대운하를 저지하고, 서민복지를 침해하는 일은 단호히 막는 등 야당 역할을 제대로 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말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이번 선거를 발판으로 ‘야당’의 색체를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지도 있다. 민주당 송영길, 김상희, 박영선, 변재일, 백원우 의원 등 의원 및 당직자 40∼50여 명은 서울 시청 앞 촛불집회에 동참, 장외 강공 드라이브를 이어갔다.
민주당은 이를 통해 6·4 재보선 선전의 여세를 몰아 여권을 고립시키는 한편 대안세력의 존재감도 과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면에는 ‘장외투쟁’에 대한 부담감도 적지 않다. 민생현안이 산적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이 국회를 버리는 사태가 장기화되는 것은 ‘역풍’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늘고 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 등원을 촉구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지며 부담감은 커져가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도서관을 예방한 원혜영 원내대표 등 민주당 원내대표단에게 “국회의원은 국회에 들어가야 한다. 원내에서 싸우라고 국민이 뽑아준 것”이라며 “의원 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원내에서는 원래 야당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은 “1963년부터 내가 국회의원을 했지만 야당 하면서 원내에 등원 안하고 성공한 적이 없다”며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장관, 총리 불러다가 답변도 듣고 따져야 한다”고 원내에서 ‘야당’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했다.
군소정당 ‘우리도 있다’
자유선진당과 민주노동당도 이번 선거를 통해 상승곡선을 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자유선진당은 총선에서 충청권을 얻었으나 이후 무소속 당선자 등 충원인력 확보에 실패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창조한국당과의 원내 교섭단체 구성도 지지부진한 상태. 그러나 여당과 같은 ‘보수정당’이면서 민주당, 민노당과 손을 잡고 쇠고기 재협상을 주장하면서 그 상징성으로 주목받았다.
선진당은 충남권 4곳에서 실시된 광역·기초의원 선거를 모두 휩쓸었다. 그러나 당의 한계도 체감했다는 게 공통된 반응이다. 선진당은 이번 선거를 기회로 수도권과 충북권 등에서 의석을 확보, 전국정당 건설의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인천 서구청장 선거, 충북 광역의원선거에서 패배 ‘충남권’의 영향력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특히 인천 서구청장 선거의 경우 승산이 있다고 보고 이회창 총재가 적극적으로 지원유세에 나섰지만 현격한 차이로 3위에 그쳐 선진당의 기운을 빠지게 했다.
선진당은 권선택 원내대표는 “(충남)지역은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수도권에서 교두보 확보에 실패했다”면서 “미미하더라도 조금이나마 전국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줬으면 하는 기대를 가졌는데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민노당은 ‘쇠고기 파동’ ‘강기갑 효과’ 등을 기반으로 2년 만에 10%대 지지율을 얻은데 이어 경남 창원에서 광역의원인 손석형 후보를 당선시키며 군소정당의 가능성을 열었다.
민노당은 재보선을 통해 국민들이 정부와 한나라당의 실정을 심판했다고 평가하고, 쇠고기 재협상을 위한 국민운동에 돌입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또한 쇠고기 문제에서 드러난 민심을 폭넓게 수용하면서 향후 공공부문 및 의료 민영화 철회, 학교자율화계획 포기, 대운하 계획 중단 등에 대해서도 분야별 정책 대안을 만들어 국민 정서를 대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