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묻지마’ 불특정 다수 향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범죄 일어날지 예측 불가
강원 동해 여공무원 살해 사건 등 국내는 물론 일본 등 선진국에서도 기승
‘묻지마 범죄’ 일종의 선진국형 범죄로 사회 양극화에 따른 병리 현상
‘은둔형 외톨이’ 처럼 가족·친구·사회적 지위 없는 이들이 범죄 저질러
‘이유도 없다. 그 누구라도 상관없다’. 최근 불특정 대상을 상대로 이유도 없이 흉기를 휘둘러 살인을 저지르는 이른바 ‘묻지마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들 묻지마 범죄자들은 ‘세상 살기가 싫다’며 관공서에 들어가 여성 공무원을 살해하는가하면 공원을 산책 중이던 여고생을 범행동기 없이 살해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선 언제 어디서 내가 혹은 내 주변 사람들이 당할지도 모르는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묻지마 범죄’. 아직 경찰전문가들 조차 그 개념이나 유형, 범행 이유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최근에 언론이 만들어낸 ‘뚜렷한 범행동기 없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저지르는 범죄’를 일컫는 신조어다.
‘묻지마 범죄’는 무동기 범죄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그만큼 범행 동기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만 봐도 개개인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들 범죄자들은 경찰조사에서 뚜렷한 범행동기를 말하지 못했다. 그저 ‘세상 살기가 싫어서’ 라는 식의 막연한 이유를 말할 뿐이다.
‘묻지마 범죄’의 피해자는 내가 될 수도 있고 또는 내 주변 사람들이 당할 수도 있는 불특정 다수를 노린 범죄다. 피해자의 연령은 특정 연령에 국한되어 있지 않지만 그중 여성, 노인, 아동이 범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세상 살기 싫어서’
그동안 우리 사회는 ‘묻지마 범죄’는 미치광이 내지는 정신병이 있는 사람이 저지르는 범죄라고만 치부하고 그 예방책이나 구체적인 범죄에 대한 개념조차 세우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 7월22일 강원 동해시청 여공무원 살해 사건이 발생하는 등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묻지마’식 범죄가 잇따라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일본에서까지 충격적인 ‘묻지마’ 살인사건 소식들이 들려오면서 ‘묻지마 범죄’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지난 7월22일에 발생한 강원 동해시청 여공무원 살해사건은 대낮에 30대 남성이 관공서 민원실에 난입해 아무런 이유 없이 여성 공무원을 흉기로 잔혹하게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다.
22일 사건 당일 피의자 A씨는 동해시 한 생활용품점에서 흉기를 구입한 뒤 시청 건물로 들어가 “여기가 공무원들이 일하는 곳이 맞냐?”며 민원실에서 근무하던 B(37·여)씨를 무참히 살해했다.
경찰조사에서 A씨는 “세상 살기 싫어서 감옥에나 가려고 그랬다”고 진술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그동안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근로자로 근무해왔다. 그런데 최근 일거리가 줄어 월세조차 내기 힘든 처지가 되자 범행을 결심, 월세방을 정리하는 등 사전에 범행에 대한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A씨는 2년 전인 지난 2006년 11월에는 부산시 모 전자제품 대리점에 아무런 이유 없이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지른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는 등 ‘묻지마 범죄’ 전력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날 일본에서도 ‘묻지마 범죄’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7월22일 밤 일본 도교 하치오지(八王子)시 서점에서 서점직원 2명이 흉기에 찔려 이 가운데 1명이 사망하는 등 일본에서도 ‘묻지마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NHK와 요미우리신문이 23일 보도했다. 이는 ‘묻지마 범죄’가 우리 사회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사회문제가 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사회가 낳은 병리현상
전문가들은 이번 동해 살인 사건 및 최근 발생하고 있는 ‘묻지마 범죄’를 더 이상 단순히 한 사람이 저지른 일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범죄전문가에 따르면 ‘묻지마 범죄’는 일종의 선진국형 범죄로 사회가 양극화되면서 나타나는 사회적 병리현상이다. 우리 사회는 현재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극심한 사회 양극화를 겪고 있다.
이로 인해 빈부격차가 커지고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계층이 늘고 있다. 또 동해 살인 사건의 피의자처럼 일용직 근로자들은 경제악화로 일자리를 잃고 사회로부터 외면 당함으로써 사회적 박탈감과 사회에 대한 불신불만을 가지게 된다.
이로 인해 사회에 복수하겠다는 생각 또는 분노의 표출구로 ‘묻지마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범죄자 개인의 심리상태로 보면 ‘극도의 스트레스 등에 따른 자기조절능력 실패에 의한 우발적 범죄’라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형민 박사는 말했다.
박 박사는 “어떤 문제 상황에 놓인 가해자들은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본인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책임을 외부요인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사회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해 자신의 폭력성을 외부로 표출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회에 대한 불만은 이번 동해 살인 사건처럼 어떤 국가라는 상징성을 지닌 대상을 상대로 표출되기도 한다”고 전했다.
경기대 이윤호 행정대학원장도 ‘묻지마 범죄’는 금품을 목적으로 하는 생계형 범죄가 아닌 사회전체에 대한 불만 등을 분출하는 ‘표출형 범죄’라고 지적한바 있다.
박 박사는 묻지마 범죄자들이 뚜렷한 범행 동기는 없어도 그들의 범행을 촉발시키는 ‘촉발요인’은 있다고 설명했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반란
급증하고 있는 ‘묻지마 범죄’를 줄일 수 있는 대책은 없는 것일까.
많은 범죄전문가들은 이 부분을 굉장히 어려워하고 있다. ‘묻지마 범죄’ 특성상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어떠한 방법으로 범죄를 저지를지 예측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검거가 된 범죄자들도 그 동기와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 행동패턴이나 성격 등을 분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박형민 박사는 사회적 복지 제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을 충고했다. 그에 따르면 ‘묻지마 범죄자’들은 대부분 지킬 가족도 집도 돈도 사회적 지휘도 없다. 이들에게 지켜야 될 그 무엇이 있으면 이런 범죄들은 줄어들 것이란 거다.
실제로 일본의 ‘묻지마 범죄’ 연구 결과, 이들 범죄자들 대부분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은둔형 외톨이’로 드러났다. 이번에 발생한 동해 살인 사건 범인 A씨도 집도 가족도 없이 전국을 떠돌던 일용직 근로자였다.
박 박사는 “공동체 의식이 사라지고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있는 현대 사회는 이웃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갖지 않는 사회가 됐다”면서 “이런 소외되거나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친구가 되어주고 조언을 주기만 해도 범죄를 예방을 할 수 있다”며 우리부터가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