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 싸움이 점입가경이다. ‘화해 모드’로 출발했던 전·현 대통령이지만 이는 ‘대외용’에 불과했는지 정권 이양부터 시작된 신경전은 혈투로 번지고 있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이 대통령은 검·경을 활용, 전 정권의 비리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인사들의 비리가 이 대통령의 ‘성긴 그물’에 걸려 수면위로 끌어 올려 지고 있으며 이를 통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압박도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노 전 대통령도 측근들의 세 확장을 통해 견제에 나서고 있다. 친노 단체들이 선을 보이고 있으며 관련 단체들의 움직임도 부산해지고 있어 일각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측근을 통해 정치권에 메시지를 전한다거나 부득이한 경우 측근들에게 등을 떠밀려 앞으로 나서지 않겠냐’는 관측까지 일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권력의 축’을 둘러싼 쟁투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른바 ‘9월 전쟁’이라 불리는 전·현 대통령의 격돌 기미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어 정치권의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다.
정권교체 암흑기의 도래
이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의 관계가 삐거덕대기 시작한 것은 이 대통령이 인사 실패와 정책 혼선, 쇠고기 파동 등으로 지지율 추락을 맛보면서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이 대통령은 “한·미 쇠고기 협상은 이미 1년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국측과 합의해 개방을 약속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전 정권에서 결정한 일 때문에 국민들에게 몰매를 맞는다는 ‘설겆이론’은 “원칙적 관점에서 쇠고기 협상이 아무리 잘못됐다고 할지라도 정권 퇴진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헌정질서에 맞지 않고 민주주의 질서 속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이 대통령을 감쌌던 노 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다.
촛불집회의 뒤에 친노 인사들이 있다는 ‘배후론’이 제기되며 이 대통령은 위기감을 느끼지 시작했다. 그는 5월15일 첫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지난 10년의 그늘이 크고 그 뿌리도 생각보다 깊더라”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현 대통령 정권 주도권 다툼 현재진행형…과거 뿌리 채 뽑는다
이명박 국정 탄력 기회삼아 청와대發 ‘9월 쓰나미’ 검·경 총동원령
그리고 ‘봉하문서’로 사건이 터졌다. 청와대가 노 전 대통령이 귀향하며 들고 간 청와대 문서의 반환을 요구해 온 것. 이를 두고 전·현 대통령은 고소·고발을 운운하는 등 얼굴을 붉혔다.
청와대 소식에 밝은 한 인사는 이를 두고 “터질 일이 터진 것”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측이 문서를 들고 간 것은 분명 불법이나 이는 이 대통령측이 의도했던 일이라는 것.
그는 “정권이양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은 TF까지 가동하며 원활한 이 대통령의 인수작업을 도우려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측이 청와대 업무 인수인계를 거부한 측면이 있다”며 “인수위 시절 이명박 당선인측이 인수인계를 거부하자 노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이명박 대통령과는 계속 삐거덕거리겠구나. 우리를 보호해 줄 의사가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반노무현’이 승리의 원동력
정권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전·현 대통령의 대립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 대통령도 사정의 칼날을 들이대며 ‘전 정권’의 폐단을 지적, 현 정권의 ‘새로운 도약’을 꾀하고 있다. 특히 이 대통령의 경우 ‘반노무현’의 기대에 힘입어 당선된 것이어서 전 정권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거셀 수밖에 없다.
이 대통령이 ‘정권교체’의 완성을 위해 든 패는 ‘사인선사마(射人先射馬)’다. ‘장수를 잡으려면 그가 탄 말을 쏘라’는 것. 즉 노 전 대통령을 잡기 위해 ‘측근’을 노린다는 계책이다.
이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사정’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검찰청 중수부는 새 정부 출범 후 공기업 및 국가보조금 비리를 ‘2대 중점 척결 대상 범죄’로 규정해 20여개 공기업·공공기관에 대한 감사원 자료와 비리 의혹 제보 등을 수집해 관할 검찰청에서 수사 또는 내사토록 지시했다.
검찰은 지난 6월초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카지노업체 그랜드코리아레저의 비리 의혹을 수사하던 중 카지노 영업장 임대업체인 한무컨벤션측이 지난 2004년 외국인 전용 카지노인 ‘세븐럭’ 강남점의 임대 사업장으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 측근에게 로비해 영업장 임대권을 따 냈다는 진술을 확보해 수사에 들어갔다.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정화삼씨가 대표이사로 영입됐던 제주 제피로스 골프장 조세포탈 사건과 관련, 국세청 세무조사 자료를 확보하는 등 전면 수사에 착수하기도 했다. 제주 제피로스 골프장 대주주인 정홍희 스포츠서울21 전 회장을 구속됐으며 정씨도 정 전 회장의 수십억원대 비자금 조성 의혹과 관련 의심을 받고 있다.
참여정부 장관급 인사로는 처음으로 강무현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장·차관 시절 관련 기업과 단체에서 1억원에 가까운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또한 검찰은 해운업체들이 강 전 장관은 물론, 참여정부 시절 해양부 고위 공무원들과 청와대 비서관들까지 정기적으로 관리한 정황과 단서를 포착, 진위를 확인하는 등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최근에는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인 박연차 회장이 소유한 태광실업과 정상컨트리클럽이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았다. 직원 10여 명을 경남 김해에 있는 태광실업과 정상컨트리클럽에 파견, 회계관련 자료를 확보한 국세청은 이번 조사를 “5년마다 하는 정기 세무조사”라고 밝혔지만 검찰이 태광실업이 농협 자회사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특혜의혹에 대한 수사를 하고 있어 “노 전 대통령에게 타격을 입힐 ‘한 방’을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정치권의 관측을 부르고 있다.
지금은 참지만 “두고 보자”
이 대통령의 ‘노무현 죽이기’가 구체화되면서 참여정부 인사들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가시지 않고 있는 가운데 노 전 대통령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평소 이 말을 좋아해 자신의 필명을 ‘노공이산’이라 칭하기도 한 노 전 대통령은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말처럼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자신은 정치 현안과 거리를 둔 촌노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봉하마을에 터를 잡고 그곳에서 생태계를 살리고 농가 소득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경제’ ‘성장’을 중시하는 동안 잊혔던 부분들에 대한 관심을 보내고 있는 것. 또한 이러한 생태계 복원 사업이나 농촌 소득 성장 방안 마련은 이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문제에 대한 영향력처럼 그만의 ‘영역’을 만들었다는 평이다.
‘남이 보기엔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언젠가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우공이산’의 뜻과도 일맥상통한다.

노 전 대통령이 ‘산을 옮기는 노인’이라면 그의 측근들은 ‘노인의 자손’이다. 이들은 각종 모임과 연구단체를 만드는 등 두드러진 행보를 보이고 있다.
참여정부에서 ‘실세총리’로 이름 높았던 이해찬 전 총리는 지난 4월 설립한 재단 ‘광장’에 매진하고 있다. ‘광장’에서는 남북, 경제, 교육 등 분야별 연구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진보진영의 복원을 목표로 하는 참여정부 장·차관 출신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어 이 전 총리가 이들을 기반으로 ‘킹메이커’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성경륭,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김성환 전 정책조정비서관 등은 참여정부의 공과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 ‘미래정책연구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 연구원은 9월중 공식 발족할 예정이며 10월4일 남북정상회담 1주년 기념식을 준비하고 있다.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은 ㈜봉화를 설립, 노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가꾸기 사업을 지원하면서 주민들과 함께 소득을 증대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고자 하고 있으며 노 전 대통령의 최대 정치자산인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는 대통령기록관 건립을 자체 추진키로 결정하고 모금 활동 등을 전개 중이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기념사업을 위한 재단 설립을 준비 중이다.
노무현 ‘청정회’ ‘미래정책 연구원’ ‘광장’ 측근 세력화로 방어막
“‘사정’ 내 손바닥, 승자는…” “멀리 보는 새가 오래 살아남는다”
정치권에서는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이 노 전 대통령의 맥을 잇고 있다. 민주당 내에는 안 최고위원 외 이광재, 서갑원, 백원우, 송민순, 이용섭, 조영택 의원 등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전해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 윤승용 전 홍보수석 등 참여정부에서 일했던 인사 60여 명이 ‘청정회(靑政會)’를 통해 정치 세력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들은 “정치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친목을 강화하려는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시각은 지나치다”고 항변하지만 참여하는 인사들 중 2010년 지방선거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아 2년 뒤 ‘참여정부 브랜드’를 염두에 둔 행보가 아니냐는 시선을 받고 있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이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의 기 싸움에서 당장은 이 대통령의 승리가 확실하다”는 관측을 내놨다. 정권을 잡고 있는 최고 권력자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정치는 생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이 대통령이 현재 국정 동력을 회복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정권 초부터 권력누수현상을 겪었던 만큼 제2, 제3의 쇠고기 파동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며 “보수와 진보의 패러다임으로 봤을 때 이 대통령의 보수는 진보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다음 대선이 왔을 때 ‘반노무현’으로 이 대통령이 당선됐듯 ‘반이명박’으로 친노가 득세할 수도 있지 않겠냐. 친노의 정치시계는 아직 흘러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다른 관계자도 “노 전 대통령이 준비하는 토론사이트 ‘민주주의 2.0’에 대한 기대가 크다”며 “노 전 대통령은 이 사이트를 토론을 위한 공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쇠고기 파동에서 나타난 ‘아고라 정치’ 혹은 ‘사이버 정치’를 훈련·확산시킬 수 있는 곳이 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현실정치 참여 배제’를 외친 노 전 대통령이 움직일지 움직이지 않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언젠가’를 위해 꾸준한 체력을 비축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버릴 수 없게 한다”고 덧붙였다.
각종 정책에서 ‘구관’의 그림자에 치이며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정책을 부정하는 ABDR(Anything But DJ·Roh, 김대중·노무현을 뺀 다른 것)식 사고의 늪에 빠진 이 대통령과 이 대통령의 공세를 묵묵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노 전 대통령. 정치권이 이들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