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더 이상 개인문제일 수 없다
-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직장에서의 조기퇴출, 경제난, 취업난 등으로 우울증이나 각종 스트레스성 정신질환이 증가 추세 -
“‘인간은 아직 무엇인가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인생을 포기해선 안된다’라는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라는 베토벤의 고백.
이 고백은 일생을 치명적인 청각장애 등으로 절망적인 고통에 시달렸던 그의 삶의 과정에서 여러 차례 자살이란 유혹에 빠졌었음을 알 수 있는 말이다.
지난 2월 하순경 실력파 연기자로 촉망을 받던 故 이은주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충격을 주었다. 이렇듯 자신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여생을 지내야할 노모(老母)를 남겨두고 무엇 때문에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택한 것일까? 그보다 앞서선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남자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한강에 투신한 20대 직장여성의 얘기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급기야는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은 아홉 살 초등학생이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져 충격을 더했다.
이들이 자살을 택한 이유는 지금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간 이들 대부분은 우울증이란 질병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자살로 이끄는 ‘죽음의 독감’인 우울증. 더 이상 우울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OECD국가 중 자살 사망률 4위...
자살의 80% 우울증 단계 거쳐...
이은주 씨의 자살로 한동안 큰 문제가 됐던 ‘자살 사이트’도 여전히 유령처럼 인터넷상을 떠돌고 있다. 지난 주 서울 잠실동의 한 모텔방에서 동반 자살한 네 명의 남녀는 바로 그런 경로를 통해 만난 사이였다. 그런가하면 연전 큰 파문을 일으켰던 재벌회장의 투신과 얼마 전 전직 대법원장의 투신은 서로 동기야 다르지만 자살이 계층을 가리지 않고 우리사회에 보편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게 한다.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 약물중독, 치매, 스트레스 등 정신질환은 본인은 물론 가정까지 파탄에 이르게 하는 고질병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3년 1만932명이 자살로 사망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자살자의 80%가 우울증 단계를 거친다고 분석했다.
또한 정신질환에 의한 문제는 전 세계적인 현상임을 세계보건기구(WHO)의 연구결과를 통해서도 증명됐다. 세계보건기구는 사망과 질병에 의한 장애를 동시에 감안하면 1990년대에는 폐렴·장티푸스 등 법정 전염병이 주요 사망원인이었지만 2000년대에는 허혈성 심장질환, 우울증, 교통사고가 3대 주요 사망원인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특히 이 가운데 정신질환이 차지하는 질병부담률이 1990년대에는 10%에 불과했지만 2000년대에는 50% 이상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수명에 영향을 주는 10대 장애 질병 가운데도 우울증, 알코올 중독, 조울증 등이 포함돼 있다. 국내 정신질환 역학조사에서도 우울증이 있을 경우 한 달에 최소 6일, 신체적 질병 4일, 불안장애 3일, 알코올 중독 2일씩 일상생활에 장애가 있다고 조사되었다.
전문가들은 사회·경제적 변화가 빠른 우리나라의 경우 정신질환 문제는 앞으로 큰 사회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조심스레 진단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직장에서의 조기퇴출, 경제난, 취업난 등으로 우울증이나 각종 스트레스성 정신질환이 증가 추세에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러한 우리나라 국민 정신건강의 악화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중 자살 사망률 4위라는 불명예까지 얻게 되었다.
◆우울증의 원인
우울증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이는 다른 질병과 다르게 복합적인 이유로 발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전적 소인이 포함되어 있거나 고려에 따른 뇌의 감정 조절 기능이 약화돼 우울증이 발생하기도 한다고 전문가는 지적한다.
여기에 조용하고 침착해 모든 일에 걱정이 많고 쉽게 감동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게다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강한 의무감과 책임감, 업무에 대한 열성, 철저함, 꼼꼼함 등을 특징적으로 보이는 사람도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
이 외에도 아무 이유 없이 우울증이 오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의 감기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우울증 증상
우울증은 신체적으로는 만성 피로감과 가슴 답답함, 어지럼, 식욕부진과 두통, 근육통, 성욕감퇴, 불면증 등이 나타나는데, 특히 ‘의욕·식욕·성욕’의 3가지 기본욕구 감퇴가 우울증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증상은 하루중 아침에 가장 심하며 이 때의 충동이 자살의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또 우울증 환자의 10%는 자살충동과 함께 피해의식과 망상, 환청 등 환각증상을 겪는 정신질환으로 발전하는 만큼 예방과 조기치료가 중요하다.
우울증은 여러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다. 생물학적으로는 뇌의 신경전달 물질인 세로토닌, 도파민 등이 부족해서 생기며, 자존감이 낮고, 자신에 대해 엄격하거나 의존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보다 발병률이 높다. 이혼, 사별, 실직, 스트레스도 주요 원인이며 이밖에 뇌, 소화기, 심장 등에 심각한 질환을 가진 경우에도 우울증이 나타난다. 성별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2배 이상 높은 발병률을 보인다.
◆ 우울증과 자살
우울증 환자의 자살 위험도는 ▲만성 우울증과 심한 우울증이 있는 경우 ▲과거 자살시도 경험이 있는 경우 ▲가족 중 자살한 사람이 있는 경우 ▲신체질환이 심한 경우 ▲독신남자 및 실직자인 경우 등이 자살 충동이 높다.
이들 가운데 80%는 자살 시도 전에 주변에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내 인생 은 끝났다’ ‘자살하고 싶다’ 등 자살을 암시하는 말을 한다. 또 유언장을 쓰거나 마치 앞으로 긴 여행을 떠날 것처럼 주변을 정리하고 아끼던 물건을 남들에 게 준다거나 극도로 힘들어하던 사람이 갑자기 매우 평화롭게 행동하는 것 등은 자살을 암시하는 행동으로 분류된다.
이때는 정신과적으로 응급상황이므로 즉시 의사와 상담하도록 하여야 한다.
또 이 같은 말ㆍ행동은 ‘ 발 도와달라’는 뜻이므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우울증이 의심되는 사람이 자살할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위험한 약물이나 도구를 숨기고 있는지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고 전문가는 설명한다.
◆우울증의 치료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의 80% 이상은 성공적으로 치료된다고 의학계는 본다. 약물을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두뇌가 긍정적인 사고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식으로 치료는 진행된다. 자연 속에서 산책하기, 예술작품 감상하기, 좋은 음악 듣기, 좋아하는 영화 보기, 원예, 분재 등 마음을 차분히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좋다.
이 외에도 스스로 마음을 압박하고 억누르는 생각을 없애는 것도 중요하다는 게 전문의들의 설명이다.
우울증에 사용하는 약의 종류에는 제일 먼저 기분을 좋게 만드는 약, 둘째 불안과 불면을 가라앉히는 안정제, 노년기에 자주 나타나는 초조함을 없애주는 약, 자살의 충동을 멈추어 주는 약 등이 있다.
그러나 약물에 따라 전혀 다른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
시야가 몽롱해지거나 앉았다가 일어설 때 저혈압이 되면서 어지럼증을 느낄 수도 있다.
체중이 갑자기 증가되거나 불면증, 불감증, 구역질 등이 생기기도 한다.
최근에는 새로운 항 우울제들이 많이 개발돼 부작용이 없거나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고, 약물의 습관성을 초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울증 약을 복용할 경우에는 술이나 알코올이 함유된 음료는 약물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어지러움을 가중시킬 수 있으므로 금해야 한다.
치료 후 증상이 호전되더라도 너무 빨리 약물을 중단하는 것은 삼가야 하며, 우울증 치료 때 약물을 사용하더라도 가급적 환자 스스로의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울증을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더 나빠지지 않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우울증에 대한 오해
일반인이 우울증에 걸렸다고 하면 주변에서는 힘내고,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면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됐다. 치아가 아픈데 ‘힘을 내면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의학 전문가는 “우울증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는 현재 환자가 갖고 있는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 우울증에 걸렸다고 정신ㆍ신체ㆍ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잘못됐다. 우울증을 영적인 병이라고 생각해 신(神) 등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 우울증 예방
너무 어려운 목표나 과중한 책임감은 갖지 않는 게 좋다. 식사ㆍ운동을 비롯해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도록 노력하고 기분 좋게 하는 운동ㆍ영화ㆍ종교ㆍ사회활동 등에 참가한다. 자기가 우울한 것을 숨기지 말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 기분 좋게 하는 5가지 방법
1. 규칙적인 수면
잠 자는 시간이 불규칙해 하루 생활 리듬이 일정하지 않으면 생체시간을 조절하는 ‘멜라토닌’ 분비에도 혼란이 온다. 또 잠이 부족하면 세로토닌 등 신경전달물질 분비에도 이상이 생길 수 있다. 대신 잠을 약간 적게 자면 환각 작용을 일으켜 오히려 기분은 좋아진다. 밤 11시∼아침 7시 사이에 규칙적으로 자는 것이 가장 상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 일정한 일광욕 즐겨야...
빛의 양에 따라 생체시간을 조절하는 멜라토닌은 일조량이 늘어나는 봄에 적게 나와 기분을 들뜨게 했다가, 일조량이 감소하는 가을부터는 분비가 늘면서 기분을 가라앉게 한다. 따라서 가을, 겨울에는 가능한 한 햇빛에 많이 노출되도록 낮에 산책을 하는 것이 좋다. 집안에도 햇볕이 잘 들게 하는 것이 기분을 밝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3. 규칙적인 식사
폭식을 하거나 저녁 늦게 간식을 먹으면 체중이 늘어나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비만이 되면 자신감을 잃고 대인기피증이나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특히 자기 전에 단 것을 먹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한다.
4. 적당한 긴장 상태를 유지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가 지쳐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지만, 반대로 스트레스가 전혀 없어 너무 무료해도 뇌 활동은 감소한다.
우울하다는 것은 곧 뇌의 활동이 둔해진 상태다. 실제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뇌 PET 사진을 찍어 보면 혈류량과 뇌 활동이 크게 감소한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운동이나 취미활동 등 적당한 긴장과 신체활동으로 뇌가 활발히 활동하도록 해야 한다.
5 완벽주의에서 벗어난다
항상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려는 사람은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고, 높은 기대 수준은 어쩔 수 없이 실망과 절망을 낳는다.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면서 스트레스도 쌓이고 기분의 변화도 급격해진다.
평소 편안하고 느긋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고, 기대의 60∼70% 선에서 만족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우울증의 자가 진단법
1. 계속되는 우울, 불안, 혹은 공허감
2. 절망적인 느낌, 염세적 사고
3. 죄책감, 무가치 혹은 무기력감
4. 성생활을 포함해 즐거웠던 일이나 취미생활에서의 의욕 및 흥미상실
5. 불면, 아침에 일찍 깨거나 과다한 수면
6. 식욕감소나 체중감소, 과식이나 체중증가
7. 힘이 없고 피로하며 몸이 쳐지는 기분
8. 죽음이나 자살에 대한 생각, 자살기도
9. 초조감, 쉽게 짜증이 남
10. 집중력 및 기억력 저하, 의사결정을 하는데 어려움
※ 위 증상 가운데 4~5개 이상의 증상이 있으면 우울증 가능성
10대 청소년 우울증 진단법
1. 민감해지고 화를 잘 낸다.
2. 쉽게 지루해 한다.
3. 지나치게 죄의식을 갖는다.
4. 돌연 소리를 지른다.
5. 불만을 토로하며 가출하겠다는 말을 한다.
6. 식습관이나 식욕, 체중이 변한다.
7. 잠을 못 이루거나 지나치게 많이 잔다.
8. 항상 비애감에 빠져 있다.
9. 지나치게 활력이 줄고 무기력해 있다.
10.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11. 죽음이나 자살에 대한 말을 자주 한다.
※ 위 증상 가운데 4~5개 이상의 증상이 있으면 우울증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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