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꿈을 위한 변화의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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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당선자 버락 오바마

▲ ‘We can believe in CHANGE’ ‘검은 케네디’로 군중 앞에 나타난 버락 오바마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변화(We can believe in CHANGE)’를 외쳤고 지지자들은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고 외치며 변화에 동참했다.


미국인들은 ‘변화(Change)’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지난 4일 치러진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최종 득표율 52%로 선거인단 364명을 획득, 47%의 득표로 174명을 얻은 공화당 존 매케인 대선후보를 따돌리고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날 선거에는 전체 유권자 중 64%에 달하는 1억3100만명이 투표에 참여해 44년 만에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민주당은 대선과 함께 치러진 상·하원, 주지사 선거에서도 승리해 1994년 이후 처음으로 행정부와 의회를 동시에 장악했다. 각종 이변의 쏟아낸 이번 대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버락 오바마’라는 인물이었다. 이전의 미국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이변’과 ‘변화’가 모두 그로 인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혜성처럼 나타나 미국민의 마음에 변화의 바람을 불게 한 이. 그러나 그는 ‘최초’라는 수식어로 장식된 대선 승리를 변화가 아닌 변화를 만들 ‘기회’라고 말한다.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반쪽 흑인’
“인종이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생각 넘어 인권지킴이로 빈민가 누벼



미국의 선거 역사와 정치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미국과 전 세계에 승리의 깃발을 높이 올린 버락 오바마. 그의 미래는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통해 드러난다.

순탄치 않았던 어린 시절

오바마는 파란만장한 유년을 보냈다. 그는 1961년 8월4일 아프리카 케냐 유학생으로 하와이대를 다니던 같은 이름의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0년 대학 강의실에서 만나 결혼했던 그의 부모님은 그러나 그가 2살 때 이혼을 했다. 아버지는 하버드대 경제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고 어머니는 그가 6살 되던 해 같은 대학에 다니던 인도네시아인 롤로 소에토로와 재혼했다.
이후 오바마와 어머니 앤은 새 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살게 됐다. 인도네시아에서 머무는 4년 동안 오바마는 이슬람교 학교와 카톨릭 학교를 2년씩 다녔다. 앤은 “아들을 미국에서 가르쳐야 겠다”며 그를 친정으로 보냈고 오바마는 1971년부터 하와이 외가에서 지내게 됐다.
인류학자였던 앤은 다음해 롤로와 갈라섰으나 연구 때문에 주로 자카르타에 머물게 되면서 오바마의 양육은 외할머니 매들린 던햄의 손에 맡겨졌다. 그녀는 피부색이 다른 외손자를 위해 사랑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오바마는 하와이 명문 사립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어머니처럼 그를 키워준 외할머니가 대선 기간 중 낙상으로 중병을 앓게 되자 오바마는 선거 운동을 중단하고 외할머니를 찾아 이틀간 간호하는 애정을 보였다.
오바마가 자신의 아버지를 만난 것은 부모의 이혼 후 한번뿐이었다. 그가 10살 때인 1971년 크리스마스에 하와이를 찾은 아버지를 만난 것. 케냐 재무부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농구공을 선물로 줬고 아프리카 음악을 들려줬다. 그때가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하와이에서 인도네시아로, 다시 하와이로 옮겨 다녔던 시간은 그에게 혹독한 시련을 안겨주기도 했다. 자카르타 학교에서 하와이 명문 사립학교 푸나호우 스쿨(초·중·고 과정) 5학년으로 전학한 그는 백인 아이들의 인종 차별적인 놀림을 받았다. 오바마는 운동장에 동전을 던지며 분노를 삭였고 백인 아이들을 기피했다. 고교 시절엔 피부색에 대한 번민으로 술과 담배, 마리화나를 입에 댔다.

“쓸모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오바마는 1979년 로스앤젤레스 옥시덴털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 농구 선수로 활약하면서 흑인 학생들과 정치 동아리를 만들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반 아파르헤이트 집회에 참석하며 처음으로 정치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인종이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사용해오던 ‘배리’라는 이름 대신 ‘버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한 연설에서 “부모가 ‘버락’이란 아프리카식 이름을 붙여준 건 그것이 미국에서 성공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을 걸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야윈 소년은 미국에서 잘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품었다. 희망의 담대함(the audacity of hope), 그건 신이 준 위대한 선물이자 미국의 근본이다”라고 자신의 ‘이름’이 품은 뜻을 풀어냈다.
1981년에는 아이비리그 소속 뉴욕 컬럼비아대학에 편입학, 정치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싶어 그랬다”던 그는 마약을 끊고 정치학과 외교학을 “수도승처럼 공부했다”.
컬럼비아 대학 졸업 후 뉴욕에서 잠시 일자리를 잡기도 했으나 생부가 1982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고 케냐를 방문했다. 오바마는 케냐에서 돌아온 뒤 철강산업의 쇠퇴로 슬럼화 된 시카고 흑인거주 지역에서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시민운동가로 활동, 도시 빈민운동에 투신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낙후된 주거환경, 범죄와 실업의 증가 등 지역의 문제 해결에 노력해 주목할 성공을 거뒀으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지역적이고 일시적인 방안을 넘어 국가의 법과 정치체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하버드 법대 대학원을 진학, 법률을 공부했다.
하버드대학에서 90년 권위 있는 법률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의 최초의 흑인 편집장으로 선출됐다. 하버드대 탄생 104년 만에 첫 흑인 편집장 그는 당시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의 선출은 미국의 진보를 뜻한다”고 말했다.
졸업 후 시카고로 되돌아와 유권자 등록운동을 통해 소수민족과 저소득층 시민 10만명 이상을 투표권자로 만들었다. 시카고대학에서 헌법학을 강의하면서 동시에 시민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인권변호사로서 활동을 계속했다.
하버드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값진 선물을 안겼다. 하버드 법대시절 시카고에 있는 법률회사에서 연수를 하면서 현재 부인이 된 미셸 로빈슨을 처음 만난 것. 그는 부인 미셸과의 사이에 두 딸 말리아(10)와 사샤(7)를 두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변화의 사작

그가 세상을 바꿀 변화에 한발을 내딛은 것은 19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나가 당선되면서부터다. 그는 저소득층 노동자 세금 경감과 복지 향상, 정치윤리 개혁에 초점을 맞춘 입법활동을 했고 1998년 다시 선출됐다. 2000년엔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으나 2년 뒤 주 상원의원 3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4년 7월,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의 대통령 후보를 공식 선출하는 전당대회의 기조연설자로 뽑힌 것이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존 케리는 한 선거자금 모금 행사장에서 오바마가 연설하는 걸 보고 그에게 부탁을 했왔다.
7월28일 오바마는 매사추세츠 보스턴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에서 외쳤다. “오늘밤 나는 그들에게 전한다. 진보적인 미국과 보수적인 미국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미합중국이 있을 뿐이다. 흑인의 미국, 백인의 미국, 라틴계 미국, 아시아계 미국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미합중국만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서 ‘미국인은 모두 하나’라는 기조연설로 스타덤
대중속으로 파고든 ‘변화’로 이끈 ‘오바마 바람’…젊은 흑인 대통령의 탄생


‘미국인은 모두 하나’라는 이 17분짜리 기조연설로 무명의 오바마는 일약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스타로 떠올랐다. 미국의 꿈과 희망, 그리고 자긍심을 강조한 그의 연설은 언론과 대중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오바마 바람’은 그때부터 불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오바마는 연방 상원의원 선거(일리노이주)에 도전했다. 일부에서는 흑인인데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후보인 그의 당선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 이러한 시선을 불식시켰다. 흑인으론 사상 다섯 번째로 이룬 연방의 상원의원이었다.
상원에서 그는 개혁적이고 초당적인 활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가장 먼저 발의한 법안 중 하나는 불법 체류자를 구제하는 이민 개혁 법안이었다. 그는 법안 발의 과정에서 이번에 치열하게 싸웠던 공화당 대통령 후보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협력했다.
오바마는 외교위원회 소속 상원의원으로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방지와 아프리카에서의 기아 해결에 노력했으며,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후세인 대통령의 위협이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그것을 잘못된 전쟁으로 규정했고, 전쟁의 장기화와 엄청난 인적 물적 비용,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해 경고했다.
그리고 지난해 2월 다시 한번 ‘담대한 희망’을 품었다. 흑인에겐 불가능해 보이는 대통령에 도전하겠다는 꿈, 그래서 미국과 워싱턴을 바꾸겠다는 꿈을 밝혔다. “상원 경력이 겨우 2년인 애송이가 무모한 생각을 하는 것”이란 비판이 따랐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공동체 운동을 한 그는 대중의 마음속을 간파했다. 그가 전파한 ‘변화’의 메시지는 대중의 열망을 압축한 것이었기 때문에 위력적이었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공화당 매케인 후보는 ‘경험’과 ‘준비’라는 깃발을 들고 오바마의 무경험을 공격했으나 다수의 대중은 ‘변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버락 오바마는 11월 6일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했다.

▲ 버락 오바마와 아내 미셸 오바마, 딸 말리아와 사샤.


오바마는 누구?

이름: 버락 후세인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출생: 1961년 8월4일 미국 하와이주
가족: 배우자 미셸 오바마, 딸 말리아, 사샤
학력:
옥시덴탈대학
컬럼비아대학교 정치학 학사
하버드대학교대학원 법학 박사
경력:
1992년 미국 일리노이주 인권변호사
시카고대학교 로스쿨 교수
1996년 미국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2003년 일리노이주의회 보건복지위원회 의장
2004년 미국 일리노이주 민주당 연방상원의원
2008년 제44대 미국 대통령 당선
저서:
1995년 인종과 상속
2006년 희망의 대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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