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TV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는 재벌가 자제들의 평상시 생활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궁궐같은 으리으리한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 수억원대에 호가하는 승용차를 모는 모습을 볼 때면 마치 딴 세상인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가 더 인기를 끄는 이유일 듯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다수 국민들은 이런 재벌들의 모습을 드라마에서라도 접할 때마다 동경과 함께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실제로도 현실 속 재벌들은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로열 계층을 형성, 그들만의 왕국을 구축해 놓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들 재벌들이 알려진 것과는 달리 수백억원대 ‘빚쟁이’인 것으로 드러나 눈길을 끌고 있다. 본지가 왜 그런지 알아봤다.
국내 주요 재벌 총수들 대부분 금융기관에 수십억~수천억 빌려 ‘빚쟁이’ 신세
개정 자본시장법 때문에 재벌가 곳간 현황 속속들이 드러나…재벌들 ‘대략난감’

이 같은 결과가 나오자 직장인을 가장으로 둔 대다수 일반 가정집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들의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물가는 날이 갈수록 치솟건만 돈 나올 구멍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확천금을 꿈꾸며 복권을 구매하는 이들이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내가 만일 재벌이라면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속 재벌가 자제들처럼 궁궐같은 집에서 살고, 수천억원대 유람선에서 파티를 하며, 수억원대 스포츠카를 몰 텐데….’
이는 꿈에서나 가능할 법한 얘기이지만, 그렇다고 꼭 부러워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현실 속 재벌들 역시 일반 직장인들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천억원대 빚쟁이인 것으로 나타났다.
수백억원대 담보 잡힌 재벌 회장님
최근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으로 바뀐 공시 제도에 의해 드러난 재벌 일가들에 비해 오히려 평균 2494만원의 빚을 진 직장인들이 더 살만한 것으로 조사됐다.
물론, 단순한 수치적 비교로만 따지자면 말이다. 직장인들 대부분이 빚을 지게 된 이유가 집을 장만한다거나 혹은 결혼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지만, 재벌 일가들은 수천억원대 빚을 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유는 일반인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지난 3월12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서는 우리나라 10대 그룹으로 대표되는 재벌 일가들의 주식 보유 현황과 담보 대출 내용이 공개됐다. 이들은 적게는 수억원에서 많게는 수천억원대의 주식 담보 대출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재계 10위권에 드는 재벌그룹들이 대부분이 그러했다.
일단 공시를 토대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가장 눈에 들어오는 이는 다름 아닌 재벌 총수들이다.
먼저 재계 서열 2위이자 개인 주식 평가액 기준으로 주식 부자 순위 1,2위를 다투는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의 경우 현대차 전체 주식수 1139만5897주 중 827만주를 우리은행, 대한생명, 교보생명 등 금융기관에 담보로 잡혀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정 회장은 자신이 보유한 현대모비스의 주식 678만주 전량을 SC제일은행, 삼성생명, 기업은행 등에 담보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 회장의 동생이자 주식 부자 3위인 정몽준 현대중공업그룹 최대주주(현 한나라당 국회의원) 역시 821만5주의 현대중공업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나 이중 14만주를 대한생명보험에 담보로 잡히고 100억원을 빌린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재벌 총수로는 두산가 형제들이다. 두산 박용곤 명예회장을 비롯한 박용성-박용현-박용만 회장 등 두산가 형제들도 두산 주식 840여만주를 은행에 맡겨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 최신원 SKC 회장은 보유하고 있는 SKC 113만1203주 중 108만8203주를 한국증권금융에 담보로 잡히고 현금을 빌렸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금호산업 주식 103만9505주 중 83만7160주를, 금호석유화학 주식 134만6512주 중 56만주를 각각 우리은행 등에 담보로 잡혔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도 한화 주식 1683만7949주 중 450만주를 우리은행에 담보로 잡히고 360억원을 빌렸다. 김 회장 등은 자신의 한화 주식을 담보로 걸고 다른 계열사 주식을 추가로 매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보유 중인 GS홀딩스 주식 451만8397주 중 82만1950주를 우리은행 등에 담보로 제공했다.
재벌家 자제들도 역시나 ‘빚쟁이’
재벌 총수들이 1세대였다면 2·3세들은 어떨까. 역시나 대다수가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린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재벌가에서는 1세대 오너들이 물러난 이후 2·3세들의 후계 구도 강화라든지 경영권 세습 차원에서의 계열사 지분 이동이나 지배 구조 변화 등이 잇따르고 있다.
때문에 과거 재벌들의 후계 구도 구축을 위한 편법증여나 분식회계 등으로 재벌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한 상황에서 이를 바라보는 일반 서민들의 촉각은 날이 바짝 서 있다. 특히 경제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재벌그룹의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고 있어, 재벌들로서는 개인 곳간 현황까지 공개되는 것에 대해 적잖이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런 부담스런 시선 속에서도 이번 자본시장통합법 개정으로 인해 ‘울며겨자 먹기’식으로 공개된 재벌가 곶간 현황에서는 2·3세들 대다수가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정몽구 회장의 외동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 정 사장은 보유중인 글로비스주식 중 130만, 기아차 686만주를 담보로 맡겨둔 상태다. 이는 정 사장이 보유중인 글로비스 주식의 11%, 기아차 주식의 99%에 해당된다. 담보규모는 대략 9000억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가에 속하는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의 차남인 정교선 현대홈쇼핑 사장도 보유중인 현대H&S 주식 중 9만주를 은행에 담보 설정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고 박정구 전 금호그룹 회장 아들인 박철완 아시아나항공 차장, 박삼구 회장 아들인 박세창 전략경영본부 상무, 박찬구 화학부문 회장의 아들 박준경 금호타이어 회계팀 차장 등도 각각 보유하고 있는 금호석유화학 주식 거의 대부분을 우리은행, 브릿지증권, 대신증권 등에 담보로 제공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아들인 윤홍씨, 딸인 윤영씨도 각각 GS홀딩스 주식 47만6617주, 28만8838주 중 33만4280주, 10만3360주를 우리투자증권 등에 담보로 잡혀 있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둘째, 셋째 아들인 김동원씨와 김동선씨는 각각 125만주의 한화그룹 주식을 갖고 있으나 둘 다 전량을 우리은행에 질권 설정 돼 있다.
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장녀 조현아 대한한공 상무와 장남 조원태 대한항공 상무 등도 17억원 규모의 자금 대출을 위해 각각 우리은행에 6만여주의 주식을 담보로 제공해 둔 상태다.
재벌, 빚쟁이 신세 된 까닭
그렇다면 이들 재벌들은 무슨 이유에서 대규모 담보 대출을 받고 있는 것일까. 본지가 몇몇 금융기관에 자문을 구해 본 결과, 대략 다섯 가지로 압축된다.
△계열사 지분 확보를 위한 대출 △미래 위험에 대한 방어 차원 △계열사 추가 매입 차원 △기업인수합병(M&A) 실탄용 △개인용도 등이다.
S은행 관계자는 “이번 공시의 분석을 해당 부서에 알아봤지만, 개인적 사유로 돈을 빌린 것이라 공개키는 힘들다”고 전제한 뒤 “대부분 지분 확보 차원의 대출인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A은행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 재벌에 대한 관심이 유독 많은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일이므로 정보공개를 다 할 수는 없다”며 “재벌에게도 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그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지분 확보나 계열사 추가 매입 차원의 대출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고 밝혔다.
이 외 D증권을 비롯한 K은행 등 관계자들도 거의 대동소이한 견해를 내놓았다. D증권 관계자는 “재벌의 대출은 일반인과 달리 지극히 개인 용도로 사용하기보다 회사를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 보여지며 결국 후계 구도와 경영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귀착되는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이를 다시 쉽게 풀이하면 ‘재벌이 빚쟁이가 된 이유’는 ‘부의 세습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재벌의 빚은 빚이 아닌 부의 축척을 위한 한 방법이었을 뿐이란 것.
눈여겨 볼 관심거리 ‘셋’
한편, 이번 공시로 재벌가의 개인 곳간 현황까지 공개된 가운데 몇 가지 눈여겨 볼 점도 있다. 첫째, 재벌 일가들이 주로 담보기관으로 우리은행, 우리투자증권을 선호했다는 점도 관심거리다.
금호아시아나그룹, 한화그룹 일가는 우리은행에 상당 주식을 담보로 제공했고 GS그룹 일가도 대부분 우리은행과 우리투자증권과 거래를 했다.
둘째, 그룹의 핵심인 직계는 담보로 잡힌 주식 비중이 많아봐야 절반 내외 수준에 그쳤으나 방계 가족의 경우는 대다수가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린 것도 관심거리다. GS홀딩스는 허창수 회장 외 특별관계자가 48명에 달하며 이중 대부분이 주식을 우리은행, 우리투자증권, SC제일은행 등에 담보로 제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이번 공시에서 재벌가들이 보유주식 담보대출 내역을 공시하면서 반드시 기재해야 할 항목을 빠뜨렸음에도 금융당국이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번 공시 내역에서는 담보대출 규모와 기간, 이율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개정된 자본시장통합법을 근거로 만든 공시 서식에는 담보주식, 대출액수, 이율 등을 명시하게 돼 있으나 상당수 재벌들은 이를 기재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앞으로 금융감독이 좀 더 보완해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