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대선과 지난해 총선 실패 이후 두 번째 유랑의 길에 올랐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돌아왔다. 4·29 재·보선을 통해 두 번째 부활을 꿈꾸고 있는 정 전 장관. 하지만 야당 내에서도 그를 견제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특히 자신과 말을 갈아타며 지난 13년간 한길을 걸으며 어긋난 적이 없었던 정치동지인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의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경제 살리기론’과 ‘정권 심판론’이 맞서던 여야 대결 구도보다는 야권 내의 갈등이 더 부각되고 있다. 수도권 한 곳, 영·호남 각각 두 곳 등 다섯 곳의 판세도 출렁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향후 정치적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미국 체류 중 4·29 재·보선 전주 덕진 재선거 출마를 선언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22일 오후 귀국했다.
부인 민혜경씨와 함께 귀국한 정 전 장관은 인청공항 입국장에서 “2009년 3월22일 오늘은 제2의 정치인생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며 비장한 각오와 함께 15분가량 정계복귀의 심경을 밝혔다.
정동영 “제2정치인생 살겠다”
정 전 장관은 “13년 전 정치를 시작한 초심으로 재출발하겠다”며 덕진에 출마할 뜻을 재확인했다.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할 가능성에 대해선 “당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 선두다. (당이) 그걸 이해해주리라 본다”고 말했다.
정 전 장관은 또 “국민이 위태로워지고 남북관계가 후퇴하고 모든 상황이 거꾸로 가고 있다. 여러분에게 고통을 드린 데 대해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사과한다”고 했다. 이어 “이에 맞서 힘쓰고 있는 민주세력의 집결처인 민주당을 돕기 위해 돌아왔다는 걸 알려드린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정세균 대표 체제를 확고하게 지지한다”고 수차례 강조했으며 “저를 대선 후보로 만든 민주당이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수권정당, 대안정당이 되도록 온 힘을 쏟겠다”고 말한 뒤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정세균 대표가 전주 덕진 출마에 부정적 견해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진 것에 대해 “정 대표는 우리 당의 대표이기도 하고 나의 대표이기도 하다. 동시에 대통령선거 때 나의 선대위원장이었다.”며 “서로 협력하면 당을 좀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정세균 대표 체제를 확고하게 지지한다.”고 밝혔다.
당내에서 부평을 출마설에 대해선 “그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지난 대선 때 어려움 속에서도 부평에서 30% 이상 지지를 얻었다.”며 “제가 앞장서서 돕는다면 부평을 선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정 전 장관측 관계자 역시 이에 대해 “정 전 장관이 결정할 사안이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라며 “전주 주민들의 요구가 높고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앞도적인 상황을 지도부가 잘 판단해야 한다”고 배수진을 치면서 정 대표를 압박했다.
공항을 나선 정 전 장관은 지난해 총선에 출마했던 서울 동작을 지구당을 방문한 뒤 이날 밤 11시 덕진의 선거사무실에서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덕진의 선거사무실은 정 전 장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 장소다.
4.29 재선거의 선거사무실로 쓰일 이곳은 정 전 장관이 정치에 입문한 1996년 제15대 총선과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전국 최다득표의 영예를 안겨준 장소로, 운명적인 곳 중에 하나이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고, 정치 인생 중 승리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덕진의 선거사무실은 정치입문 12년만에 원내1당의 대선후보가 된 상징적인 장소로도 지역민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날 오후 이 사무실에는 지역 정치권 인사를 비롯해 지지자 등 500여명이 발디딜 틈 없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1996년 15대 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한 정 전 장관의 정계 복귀는 두 번째다. 그는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인 2006년 지방선거에서 패배하자 독일로 떠났다가 두 달 만에 돌아왔었다.
당시 정 전 장관은 “갈등과 대결의 정치에 넌더리를 낸 국민들은 포용과 통합의 정치를 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번엔 2007년 대선과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연거푸 패배하고 그해 7월 미국으로 떠난 지 9개월 만의 복귀다.
鄭, 귀국 후 득보다 실?
그러나 정 전 장관이 4·29 재보선 출마를 선언 당시 “물고기가 물속에 사는 것처럼 정치인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내 뱉은 말처럼 그가 갈망하고 있는 정치 현장으로의 복귀 작업은 녹록치 않다. “공천 불가”라는 철옹성을 쌓아놓고 있는 당 지도부에 맞서기 위한 우군 확보 노력에 비상등이 켜졌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 복귀가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 있다는 얘기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와의 공천 담판도 무위로 그친 데다 앞서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귀국 ‘덕담’도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과 박상천 전 대표 등 잇달아 당 고문과 원로들을 만나 SOS(긴급구조)를 쳤으나 큰 소득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도 정 전 장관이 조급함을 갖는 것은 공천 완료시간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민
주당은 4월2일까지 공천을 완료할 계획이어서 남은 1주일 동안 지도부의 생각을 돌려놓아야 하기 때문. 3월22일 자신의 지지자들의 모임인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 등 지지자 2500여 명과 함께 화려한 귀국행사를 치렀던 그가 요즘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형국이다.
공천의 칼자루는 민주당 최고위원회에게 있다. 전략공천지역을 선정하는 몫도 마찬가지다. 당 최고위에서 전주 덕진과 인천 부평을 정 전 장관이 귀국하기 직전 전략공천지역으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9명으로 구성된 최고위원회가 신속하게 결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최고위는 정 대표를 비롯해 원혜영 원내대표, 김민석, 김진표, 박주선, 송영길, 안희정, 윤덕홍, 장상 최고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정 전 장관의 입장을 대변해 줄 사람은 사실상 없다는 게 복수의 당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정 대표와 정 전 장관의 만찬 회동 전날에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는 “대선후보까지 했던 사람이 염치도 없이 호남에 출마하는 게 말이 되나” “공천을 주면 절대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라는 격앙된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고 참석한 한 관계자가 전했다.
정 전 장관에게 있어 이들 최고위원들이 쳐 놓은 성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정치적 무게가 실린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당 원로들의 든든한 ‘지원사격’이 절실하다. 정 대표와의 회동 직전인 3월24일 오전 동교동 김 전 대통령 자택을 찾아간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김 전 대통령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당이 깨지면 안 된다”고 했다.
정 전 장관은 그동안 정 대표와 김대중 전 대통령, 민주당 정치 원로들을 잇따라 면담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한결같이 ‘당 화합’ 요청을 받으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더욱이 최근 검찰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정치권 로비 수사로 현역의원이 잇따라 소환되면서 민주당이 위기를 맞고 있다.
정 전 장관 측은 “당에 힘을 보태겠다”는 논리를 펴고 있지만 정 전 장관의 공천 문제를 둘러싼 ‘내홍’에 부정적인 당내외 여론이 강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정 전 장관의 ‘낙향’은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지도부 설득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마지막 기댈 곳은 지역여론의 지지 뿐이라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부를 직접 설득하는 방법에서 지역여론을 등에 업은 간접압박의 방식으로 선회한 것이다.
정 전 장관은 지난달 27일 전주행을 선언하면서 “저는 전주로, 전주 시민 곁으로 간다”며 “전주로 가서 그분들의 어려운 사정, 고통받고 있는 분들의 얘기를 들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언제쯤 서울에 올라올 계획이냐”는 물음에는 “당분간 올라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지도부와 협의를 통한 공천 문제 해결에 한계를 인정한 것과 함께 무소속출마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도 여겨진다.

‘무소속 출마 선언’ 초읽기 돌입
이런 상황에서 정 전 장관이 지난달 29일 오전 부인 민혜경 여사와 지인 등 15명과 함께 언론 등 외부에 참배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당초 국립5.18민주묘지 관리사무소에 오전 10시30분께 방문한다고 했던 정 전 장관 일행은 이날 오전 11시께 묘지에 도착, 정 전 장관 일행은 묘역 순례에 앞서 의전 직원에 민주화운동과 여성의 지위향상에 앞장서와 ‘광주의 어머니로’ 불리는 故 조아라 여사 묘역과, 80년 5월 항쟁 당시 27일 마지막으로 숨진 신학대생 故 유동훈 열사의 묘역에 참배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으며, 정 전 장관은 두 묘역에서 일행들에게 열사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는 등 묘비를 관심 있게 둘러본 뒤 참배 일정을 마쳤다.
정 전 장관이 지난 대선 출마와 낙선 등 자신의 정치적 결단과 난제가 있을 때마다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거나 광주를 방문해 왔다는 측면에서 정치권 안팎에서는 민주당의 공천 배제에 부딪힌 정 전 장관이 이번 재보선에서 무소속 출마에 무게를 두고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한 것이 아니냐는 조심스런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측근은 “이날 5.18민주묘지 참배는 광주에 오면 항상 방문했던 것의 일환으로 별다른 의미는 없다”며 “정치적으로 미묘한 상황에서 자칫 오해를 살 수 있어 비공개로 했다”고 정치적 확대해석 되는 것을 경계했다.
정 전 장관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정세균 민주당 대표다. 1996년 15대 때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입성한 정치 입문 동기다. 그 이후로 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 등 함께 말을 갈아타며 13년간 한길을 걸으며 어긋난 적이 없었다. 텃밭도 같다 정 전 장관은 전북 순창, 정 대표는 전북 진안이 고향이다.
13년 정치 동지, 鄭과 丁의 대립
이런 인연으로 두 사람은 서로 ‘선배’ ‘정 장관’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막연한 사이였다. 16대 국회에서 ‘바른정치모임’을 만들어 정풍운동을 함께할 정도였다. 또 17대 국회엔 “당과 국민을 위해 썩어가는 밀알이 되자”고 의기투합해 ‘밀알’이란 의원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두 사람이 오는 4월 재보선에서 정 전 장관의 전주 덕진 출마를 놓고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지난 24일 두 사람은 만나 ‘담판’을 지으려 했지만 입장차만 확인했을 뿐 진전이 없었다.
정 전 장관은 MBC 라디오에 출연, “전주 덕진 출마와 함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재보선 선거를 책임지고 지원하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말했다. 또 “중대한 당의 문제는 당원에게 물어보는 게 기본”이라고도 했다. ‘지역 지지율=당심’이란 논리로 당 지도부를 상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이에 맞서 정 대표도 “당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당의 뜻은 지도부의 의견이라는 반박이기도 했다. 현재로선 두 사람간 교집합을 찾기 힘들다.
이에 대해 민주당 당직자는 “타협보단 한쪽의 양보를 전제로 한 싸움”이라고 말해 결국 ‘공천’과 ‘공천 배제’ 사이에 선택만 있을 뿐 타협점을 찾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두 사람을 잘 아는 인사들은 “연배가 비슷하고 지역적 기반이 겹치기 때문에 어차피 전북의 맹주 자리와 당의 지휘권을 놓고 일전을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밀알’ 회장을 맡았던 이강래 의원은 “두 사람은 정치적 방향은 달라도 인간적 교감은 깊은 사이”라며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 당과 서로에게 모두 좋은 결과를 내기만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한편 중앙일보에 따르면 3월 30일 현재 4·29 재·보궐선거 전주 덕진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를 선언한 정동영 민주당 전 장관이 46.2%의 지지율로 다른 예비후보를 크게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곳에선 정 전 장관 공천에 대해서도 호의적이다. 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이 25~27일 국회의원 재선거가 치러질 5개 지역 유권자 274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