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영화
최근 미국공연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가수 이영화(56·순복음교회 집사)씨는 어느 때보다 활기차 있었다. 누구보다 다정한 남편과 함께여서도 그렇겠지만 현지주민들의 기대 이상의 사랑에 감동을 많이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데뷔한지 30년이 지났지만 변치 않는 가창력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그는 찬양간증을 하는 요즘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주변 사람까지 기분 좋게 하는 그와의 즐거운 만남을 지금부터 공개한다.

80년대 앳된 얼굴로 ‘실비오는 소리에’를 부르던 이영화씨는 1976년 여성 6인조 그룹 ‘버터플라이’의 보컬리스트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때부터 소문난 가창력으로 인정받았던 그는 81년 전재학 선생님을 통해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부르게 된다.
이 노래로 빌보드상과 세계가요제연맹 회장상을 수상하며 그에게 삶은 물질적인 풍요로움도 가져다 줬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서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다고 고백했다.
그런 시간을 견디게 해준 것이 바로 지금의 남편과 신앙생활이었다는데, 그런 그의 삶을 잠깐 돌아보자.
미국 울린 한국노래
폴로리다에서 열린 그의 공연에 사람들이 열광적인 박수로 응답했다.
신문에 기사가 실리고 공연이 끝나고 싸인 요청까지 쇄도하자 당사자인 이영화씨도 처음엔 경황이 없었다고 했다.
“그 사람들이 저를 알까 반신반의 했어요. 그래서 많이 긴장했었는데 저의 노래를 아시고 따라 부르기까지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공연 관계자에 의하면 “공연을 본 관객 중에 몇 명은 고맙다며 이영화씨 손에 달러를 쥐어 주기도 해 적잖이 놀랐다”는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미국 첫 순회공연, 폴로리다에서 LA까지…고향생각에 관객 훌쩍
신앙 통해 시련 극복…남편과 교회 세워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파
현지에 있는 우리 주민들이 그를 통해 80·90년대 향수에 젖었을 뿐만 아니라 고향생각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 것이다.
특히 그는 “옆에 있는 남편이 나를 자랑스럽게 여겨 기분이 좋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렇듯 폴로디다(탬파, 잭슨빌, 마이애미)에서 시작한 그의 미국 첫 공연은 텍사스(달라스, 킬린, 휴스턴)로 다시 뉴욕으로 그리고 LA까지 이어졌다.
그의 공연은 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고 입소문이 나면서 노인들이 있는 병원에까지 울려 퍼졌다.
그래서 작년 12월11일부터 시작된 그의 찬양간증은 3개월 뒤인 올해 3월2일까지 진행됐지만 공연요청은 계속됐다고 전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냐는 본지의 질문에 그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남편이 신학대학에 다니고 있어요. 저를 위해 목회자의 길을 선택해준 남편이 너무 고마워 있는 힘껏 내조를 해주고 싶다”며 그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이유로 ‘남편의 개강일’을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남편은 조금 투박한 사람이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의리 있고 남자다운 사람이긴 했지만 워낙 인상이 강해서 겁이 나기도 했었죠.
하지만 남편의 딸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어요. 너무 잘 자란 거예요. 아빠 혼자 키웠을 텐데…” 현재 대한항공사에 근무한다는 딸은 요즘엔 바빠서 집에서도 잘 못 볼 때가 많지만, 그와 만나면 못했던 얘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고 했다.
“사실 처음부터 친했던 건 아니에요. 싸우기도 많이 했죠. 아빠한테 워낙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에 아빠를 뺏긴 거 같은 기분도 들었을 거예요. 그래도 저는 그애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애의 말을 들어줬던 거 같아요. 그러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지금은 좋은 친구가 됐죠.”
그는 사실 결혼 전에 남편에게 두 가지 제안을 했다며 “하나는 자신의 ‘콘서트를 열어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남편이 ‘목회자의 길을 걸어주는 것’이었다”며 어찌 보면 당황스러울지도 모르는 부탁에 흔쾌히 응해줘서 오히려 감동받았다고 전했다.
이렇게 고마운 남편에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작사한 곡을 선물 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나온 앨범의 타이틀인 ‘황홀한 사랑’이 바로 그거에요. 너무 받기만 한 거 같아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래로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죠.”
국내에서도 끊임없이 찬양간증 요청이 들어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몇 달이나 밀려있는 스케줄 때문에 일정조절이 힘들다는 투정 아닌 투정을 하기도 했다.
신앙만이 살길
국악 예술 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노래 부르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고 한다.
유행가 가사를 따라 부르며 당시에 유명했던 패티김, 이미자, 윤복희, 윤시내 등의 모창을 하면 동네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장기자랑대회에 나가는 건 예삿일이었고 전교에서도 알아주는 ‘가수’였다고 했다.
그의 엄마는 그가 공부에 관심이 없는 것을 알았는지 국악 예술 고등학교에 보냈고 다행히 그와 학교는 잘 맞았다.
“어릴 때부터 대중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학교에서는 주로 창, 가야금, 봉산탈춤 등을 배웠지만 그 나름대로 나한테 도움이 많이 됐다며 옛날 일을 떠올리기도 했다.
“데뷔전에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던 상태라 가수의 꿈은 거의 포기한 상태였어요. 업소에서 노래불러주는 일을 했었는데 거기서 전재학(작곡가) 선생님의 눈에 들어 여기까지 온 거죠”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일찍 가장이 돼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이어갔고 전 남편의 사업이 망하고 부도까지 나면서 아들을 혼자 키웠다고 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노래만이 그의 희망이 돼 주었는데, 매스컴에서 그의 결혼소식이 알려 지면서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노래도 부르지 못하는 상황까지 왔다고 한다.
힘들게 재기에 성공해 디너 콘서트를 준비하던 와중에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심근경색으로 떠나보낸다.
아직도 아들이 살아있다고 믿는다는 그는 그렇게 믿기에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이 없었다면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며 밝게 웃는 그는 이젠 모든 것을 훌훌 털어내 버린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거 같다”며 “그땐 죽을 것처럼 힘든 일들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좋은 기운이 들어온다. 그건 하느님이 항상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고 나는 나의 노래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의 남편도 신앙과 함께 했기에 만날 수 있었다면서 그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산 남편을 자신의 길로 인도해 신학대학에 들어가게 한 그의 내조가 눈부셨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금의 남편과 함께 교회를 세워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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