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원정 사기도박단이 지난 4일 외국환거래법 위반혐의로 서울본부세관에 검거됐다. 이들 7명은 총괄책, 자금세탁책, 중국도박운영책, 유인책 등 각자의 포지션을 정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이들이 사기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중소기업 사장, 주유소 사장, 은행지점장, 건설사 대표 등 부유층 중심이었으며 지난 2006년 8월부터 2년여간 63억원을 갈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이들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것조차 몰랐을 정도로 치밀한 각본에 의해 움직였던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영화 ‘타짜’의 정마담을 연상케하는 꽃뱀을 사이에 둔 이들의 사기 시나리오를 본지가 접수했다.

골프를 치고 있는 두 명의 남자가 있다. 그들 사이로 미인 두 명이 지나간다. 미인 중 한명이 한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미인의 말에 남자는 핸드폰을 건넨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던 미인은 핸드폰을 남자에게 돌려주며 환하게 웃는다. 같은 날 이번엔 음식점이다. 역시 골프를 치던 남자들이 주문한 음식을 먹고 있다. 다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아까 그 미인들이 음식점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남자는 미인을 알아본다. 남자의 무리에 자연스럽게 합석하게 되는 미인들.
우연을 가장한 덫
이상이 피해자 A(피해자의 요청에 따라 이름, 나이, 직업 등을 밝히지 않음)씨의 증언이다.
미인들은 우연을 가장해 A씨에게 접근한 것이다.
꽃뱀 둔 해외원정 사기도박단, 2년여간 재력가 13명으로부터 63억 갈취해
수개월간 치밀한 각본으로 포지션 정해, 피해자들 사기당한 사실조차 몰라
서울본부세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미인책 2명은 피해자의 휴대폰을 빌리는 척 하면서 관심을 끈 뒤 미리 대기하던 음식점에서 우연을 가장해 피해자를 다시 만났다.
피해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들과 자리를 합석해 우연을 가장한 덫에 걸려들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누가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해 준 걸까.
사건은 그로부터 몇 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 대학의 최고경영자 수업을 듣던 A씨. 이들의 유인책이었던 B씨를 만나 수업을 같이 들으며 수개월(3~5개월)간 친분을 쌓아갔던 것.
서울본부세관의 이모 홍보담당관은 “일명 바람잡이인 ‘유인책’ 5명은 재력가들이 많은 유명 봉사단체나 모 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에 등록했다. 이는 중소기업사장, 은행지점장, 벤처사장, 건설사사장, 개인사업가 등 재력가를 꾀기 위해서”라며 “이들은 이렇게 범죄대상을 확보한 뒤 수개월간 골프, 술자리 등을 함께 하며 친분을 쌓았다”고 전했다.

골프관광 갈까요?
어느 정도 친해지자 미인책은 본심을 드러냈다.
중국에 골프관광을 가자고 A씨를 유혹한 것.
이에 대해 A씨는 “단순히 운동을 하러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과의 만남은 즐거웠다. 미인들은 얼굴도 얼굴이지만 유머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중국골프 여행이 성사되자 미인책은 하룻밤 여흥을 위한 도박을 제안했다.
도박장은 호텔내의 사설 도박장으로 그들의 하수인인 관광가이드가 일부러 이들 사기단이 운영하는 곳으로 A씨를 안내했던 것이다.
이 홍보담당관은 “이들 사기도박 조직은 중국의 하문, 위해, 하이난 등 유명 관광지내 특급호텔에 바카라 등 포커를 할 수 있는 사설 도박장을 설치했다”며 “수개월간 친분을 쌓은 미인들과 남녀 동반으로 중국 골프관광을 간 후 낮에는 골프를 치고 밤에는 현지 호텔 내에 사설 도박판으로 안내하는 등 사전에 용이주도하게 범행을 계획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처음에는 소액배팅으로 A씨를 안심케 한 뒤 현금이 소진되자 여권을 담보로 칩을 빌려주면서 점점 큰 액수의 배팅을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에 대해 A씨는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다. 원래 술을 잘 못한다. 도박에도 별 흥미가 없었지만 분위기상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세관조사결과 그들은 도박판에서 술과 함께 성분을 알 수 없는 음료수를 마시게 해 정신을 혼미하게 한 다음 돈을 빌리도록 유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그들은 중도에 도박을 포기한 피해자가 생기면 유인책들이 “내가 더 많이 잃었다”고 하거나 숙소까지 집요하게 따라가는 등 도박을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잃으면 사설 도판박 운영주가 여권을 담보로 2~10억원의 도박자금을 빌려준 뒤 여권을 빼앗아 피해자를 감금했다.
감금상태인 피해자에게는 도박과정을 모두 녹화했고 빌린 돈을 갚지 않으면 출국할 수 없다 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짜여진 각본
대부분의 피해자는 이런 말에 속아 어쩔 수 없이 국내의 친인척에게 부탁해 환치기 계좌에 돈을 입금한 뒤 여권을 돌려받아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친인척의 입금이 어려울 때는 유인책을 볼모로 중국에 감금하는 척 하면서 피해자가 귀국해 직접 입금토록 했다.
이렇게 불법 환치기 계좌로 입금된 금액은 제 3자 차명계좌로 자금 세탁됐고 수익은 유인책의 내연녀 계좌 등을 통해 분배됐다.
그러던 중 서울본부세관은 “하룻새 2~10억이라는 돈이 불법 송금되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며 “나중에는 그들 일행의 비행기 좌석까지 확인해 그들의 범행사실을 집중 추궁했다”고 말했다.
결국 서울본부세관은 재력가 13명을 대상으로 63억원을 갈취한 사기도박 조직 7명과 해외원정 도박을 한 12명 등 모두 19명을 외국환거래법 위반혐의로 검거했다.
물론 검거된 7명 말고도 미인책을 썼던 2명 역시 사기혐의로 검찰에 조사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정작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은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자신들이 사기를 당한 사실조차 몰랐을 뿐더러 그러한 사기를 친 상대를 털썩 같이 믿고 있었던 것.
심지어 일부는 사기를 당한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사기를 당하지 않았다”며 부인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이종욱 서울세관 외환조사과장은 “피해자들이 사회적 비난과 사기조직의 협박전화 등 보복이 두려워 대부분 도박사실을 부인해 수사에 애로가 많았다”며 “수사를 받고서야 유인책의 정체와 자신이 사기도박의 피해자임을 알았을 정도로 사기 수법이 워낙 치밀하고 교묘했다”고 말했다.
때문에 이 과장은 “해외원정 사기도박의 경우 사기조직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속아 도박을 한 피해자들도 불법송금 등으로 인해 처벌을 받게 되는 만큼 일반인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