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벌가에는 치맛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이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해도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 아무리 ‘여초 시대가 도래했다’고 하나, 재벌가에서는 ‘글쎄’였다. 그들이 오랫동안 구축해놓은 성문이 이를 허락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그렇게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을 것처럼 보였던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 국내 제1의 재벌가인 삼성가부터 현대, 롯데, 보령, 한진, 동양등 국내 내로라하는 재벌가의 여성들이 경영 일선에 참여,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진 남성에 비해 미흡한 수준에 불과하다. 여전히 재벌가에서는 여성의 사회 진출은 금기시되고 있기 때문. 그래도 최근 재벌가에 부는 치맛바람이 못내 향기롭기까지 하다. 이에 본지가 주요 재벌가에 부는 영자의 전성시대를 조명해봤다.
[삼성家] 性은 단지 넘어야 할 成일뿐
삼성가하면 누가 뭐라해도 우리나라 재벌가 중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가문일 것이다. 삼성그룹의 선대 회장이었던 고 이병철 명예 회장 때부터 손자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까지 화려한 혼맥을 자랑한다.
하지만 삼성가에서도 여느 재벌가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사회 진출은 과거엔 차단돼 있다시피했다.
물론 다른 재벌가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이 너그러운 편에 속했다. 이런 삼성가는 이병철 회장이 작고한 후부터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삼성에서 떨어져 나온 신세계, CJ, 한솔등이 여성 오너 중심에서 성과를 발휘한 것이다. 신세계 이명희 회장, CJ 손복남 고문, 한솔 이인희 고문등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경영’이란 시험무대를 가뿐히 통과했다. 여전히 이들은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이들도 자녀들 중에서 장자를 선택, 경영권 승계를 함으로써 삼성가에서 여성의 경영권 승계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런데 최근 삼성가에서는 이상야릇한 바람이 불고 있다. 이건희 전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호텔신라 전무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무성한 소문을 낳고 있는 것.
일각에서는 올 초 대상그룹의 장녀인 임세령씨와 협의 이혼한 이재용 전무의 황위 계승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 아니냐는 짐짓 웃지 못 할 우스개소리를 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 전무가 지난 2001년 호텔신라 기획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해마다 15%이상 매출을 끌어올리며 괄목할만한 경영수완을 발휘한 점도 성과주의자인 이 전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즉 일각의 우스개소리에 마냥 우스개소리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또, 이 전 회장의 차녀인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 역시 활발한 활동을 보이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삼성의 경영권 승계가 반드시 장남인 이재용 전무에게로 갈 것이란 과거 확신을 버리고 한 발 물러서서 추이를 지켜보는 경향도 생겨나고 있다.
이 밖에 신세계 이명희 회장의 딸인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도 전공을 살려 호텔의 리노베이션 등 디자인 분야에 집중하면서 이미 동종업계에서 두각을 낸 이부진 전무와 선의의 라이벌 구도를 형성, 세간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외에도 이병철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씨의 장녀 이미경 CJ E&M 총괄부회장도 과거 식품사업에 국한됐던 CJ그룹의 사업영역을 문화ㆍ엔터테인먼트로 넓히며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현대家] 며느리 이탈 이어 '딸들의 반란'
현대가는 재벌가문 중 가장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가풍을 지니고 있다.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 회장 때부터 여성의 사회 활동을 극히 자제해 왔던 것.
그렇다고 해서 현대가의 여성들이 다른 재벌가 여성에 비해 제약이 심했느냐면 것도 아니다. 재벌가들의 혼맥도를 보면 여성 중심의 혼맥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재벌가의 여성은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정략결혼의 수단과 도구로 쓰였다는 방증일 수도 있는데, 이에 반해 현대가 여성들은 이런 정략결혼보다 자유연애를 통한 결혼을 한 편이다.
어찌 생각해보면 현대가 여성들이 재벌가 여성답지 않게 평범한 여성의 삶을 누린 게 아닌 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여타 재벌가 여성들에 비해선 사회 활동, 즉 경영에 참여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임은 분명한 사실이 듯하다.
현대가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벽이 금이 가기 시작한 시점은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작고한 후 그룹을 부인이 맡으면서부터이다.
가정주부에서 순식간에 경영자로 변신한 현정은 회장은 당시 시숙의 난등을 뚫고 경영권을 확보하며 여장부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현 회장은 최근 주력사업이었던 대북사업이 좌초 위기에 처해 있고, 이밖에도 대내외 크고 작은 여러 악재에 휩싸여 제2의 경영능력 시험무대에 서게 됐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목을 끌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현 회장은 그의 딸에게 경영권 승계를 할 사전 준비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현 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을 것으로 관측되는 장녀 정지이 전무는 어머니를 도와 경영 일선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정 전무는 지난 2004년 현대상선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재정과 회계 분야 실무를 맡는 등 평범하게 후계자수업을 시작해 초고속 승진을 거듭, 입사 3년만에 평사원에서 전무까지 올랐다.
이 밖에 현대가에서는 정통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의 장녀 정성이 이노션 고문와 차녀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 역시 왕성한 경영 활동을 펼치며, 과거 여성의 사회 진출과 경영 참여를 금기시했던 현대가의 금문을 허물어뜨리고 있다.
[롯데家] 누나의 맹공에 남동생은 ‘움찔’
롯데가는 아직까지 창업주인 신격호 회장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때문에 여성의 경영 참여는 쉽사리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롯데가에서도 여성의 경영 참여가 두드러지고 있는 경향이다. 대표주자는 신 회장의 장녀인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 신 사장은 지난 1988년부터 20년간 롯데쇼핑 부사장 직위를 가졌으나 지난해 사장으로 직위가 격상됐다.
사실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서 말이 많았다. 롯데는 현재 일본롯데의 경우 신 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부회장이 맡고 있고, 한국롯데는 차남인 신동빈 부회장이 맡아 사실상 후계구도를 구축해놓은 상태나 다름없다.
하지만 신동빈 부회장이 한때 ‘마이다스의 손’으로 불리며 번번이 신규 사업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자, 아버지 신 회장과 마찰을 빚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나아가 일각에서는 이 틈을 타 신 사장이 계열사의 지분을 잇따라 매입한 것도 신 회장의 ‘특별한 의중’이 담겨 있다는 데 무게를 뒀다. 심지어 향후 후계 구도에 큰 변화가 일 것이란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일각의 무성한 추측에도 불구, 신 사장은 동생인 신 부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롯데쇼핑을 유통지존자리에 다시 올려놓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롯데가에서는 신 사장의 뒤를 이어 그의 큰딸인 장선윤 롯데쇼핑 상무 역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장 상무는 지난 2005년 명품브랜드 에비뉴엘 오픈을 진두지휘하며 명품브랜드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아울러, 신 회장의 영원한 샤롯데로 알려진 셋째부인 서미경씨의 딸인 유미씨의 롯데쇼핑등 계열사 지분 매입도 잇따르면서 무성한 추측을 낳고 있다. 경영 일선에 참여할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보령家 ] 언니가 끌어주고 동생이 밀어주고
재벌가에서 여성의 전성시대를 뚜렷하게 읽을 수 있는 가문은 보령가이다.
창업주 김승호 명예회장에게는 딸만 넷인 까닭일 수도 있겠지만, 딸만 둔 다른 재벌가들이 ‘사위 경영’을 주로 하는 반면, 보령가는 딸들이 전면에 나서 남성 못지 않는 경영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김 회장의 슬하에 은선·은희·은영·은정씨 등 네 딸을 두고 있다. 그중 장녀 김은선 보령그룹 회장과 막내 김은정 보령메디앙스 부회장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일단 김 회장의 장녀인 김은선 회장은 올 초 보령제약 회장으로 공식 취임했다. 그는 지난 1986년 입사해 다양한 부서를 돌며 경영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올 초 김 회장의 뒤를 이어 경영권을 물러 받게 됐다.
하지만 최근 재계에서는 보령가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있다. 김 회장의 막내딸인 김은정 보령메디앙스 부회장이 향후 그룹에서 떨어져 나가 독립 회사를 운영할 것이란 관측 이 나오고 있다.
여하튼 이들은 남성의 틈바구니에서 맨 밑바닥부터 경영 수업을 받아왔고, 결국 경영권까지 물려받게 된 점을 미뤄볼 때, 앞으로 재벌가의 여성 전성시대를 보령가가 앞장서서 열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쉽지만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한지 100일도 지나지 않아 악재를 만났고, 동생인 김 부회장 역시 고초를 겪고 있다.
먼저 김 회장의 경우 서울지방국세청이 6월말까지 일정으로 보령제약에 대해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각에서는 김 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연결 짓는 시각도 존재해 김 회장으로서는 첫 번째 경영능력시험무대인 셈이다.
한편, 김 부회장은 최근 석면 석면탈크 파문으로 한때 고초를 겪고 있다. 아직까지 각종 시민단체등에서는 이를 문제 제기하고 있어 당분간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이에 업계에서는 이들 자매들이 이번 고비를 어떻게 넘기느냐 온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동양家] 사위경영 그만, 딸들의 경영 시작
재벌가에서 여성시대를 열고 있는 가문은 동양가도 빼놓을 수 없다.
동양가의 경우 창업주인 고 이양구 전 회장의 차녀이자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의 부인인 이화경 롸이즈온 대표는 지난 1975년 동양제과에 입사한 후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대표는 최근 그룹의 신성장 동력원을 부동산과 건설로 보고 제2의 도약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일환으로 일각에서는 오리온그룹이 사옥 부지 매각과 계열사 온미디어 매각을 통한 유동성 확보에 들어갔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아울러 동양가에서는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의 장녀인 현정담 동양매직 상무보가 경영 일선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현 상무보는 현재 동양매직의 최대 개인주주다. 일각에서는 현 상무보 외에 동양매직 지분을 갖고 있는 오너 일가 개인이 딱히 없다는 점에서 향후 현 상무보가 동양매직의 차기 오너가 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또 현 회장의 부인이자 이양구 전 회장의 장녀인 이혜경 부회장은 동생과 달리 가정살림과 뒷바라지에만 충실해왔지만, 지난해부터 그룹 디자인 총괄인 CDO까지 맡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어, 향후 행보도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