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 이수근’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궁금하다.
외삼촌은 굉장히 직설적이며 솔직한 사람이다. 그렇게 때문에 당시 중정과도 많은 마찰이 있었다. 또 말도 굉장히 빠르고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내가 일처리가 늦거나 하는 날이면 혼나기 일쑤였다.
이수근을 떠올리면 가장 기억에 남은 일은 무엇인가.
외삼촌은 예의범절을 무척 중시 했던 사람이다. 남한의 대학생들이 교수님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보고는 놀라시며 남한 대학생들의 예의가 없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또 나는 그와 길을 걸을 때는 항상 뒤에 서서 걸었다. 그가 항상 ‘어른과 걸을 때는 뒤에서 걷는 것이 예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수근의 귀순 후 북에 있는 가족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나.
외삼촌 이후 귀순한 ‘김정민’이라는 당 간부 출신 사람이 있다. 그가 귀순 후 밝힌 내용으로는 ‘변절자의 가족’이라는 오명아래 노동 착취가 당하는 등의 곳으로 끌려갔으며 이곳에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간첩 조작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수근에 대한 북한도 알고 있었나.
다른 귀순자들의 말에 따르면 공산당도 이수근 사건을 두고 ‘저게 변절자의 말로다’라며 남한으로 귀순해봤자 죽음을 당한다는 내용으로 대중을 선동했다고 한다. 외삼촌의 사건을 북한에서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수근의 수기가 전량 폐기 처분되면서 탈출을 결심했다고 하는데.
외삼촌은 기자 출신이다. 수기가 전량 폐기 처분된 것은 그의 펜대가 꺾인 것이고 이것은 인간으로써 그의 자존심도 함께 꺾인 것이다. 이후 그는 “남한에도 자유가 없다. 글하나 내 맘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 무슨 자유냐”라며 한탄을 많이 하셨다. 이것이 아마 그가 탈출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 일 것이다.

출소 후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나.
만기 출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안전법이 제정됐고 이 법에 따라 나는 B등급으로 분류됐다. 이로 인해 나는 당시 대전에 살았는데 ‘이동과 주거의 제한’을 받았다. 대전을 떠나려면 경찰서로가 신고를 한 뒤 허가를 받고 이동할 수 있었다. 당시 아버님이 편찮은 적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아버님을 찾아뵙지 못한 경험이 있다.
가족들과의 관계는 어땠었나.
친인척들은 나를 만나기 두려워했다. 나를 만나면 혹시나 경찰에 불려가 수사를 받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나는 출소 후 집안 친척들의 대소사에 단 한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가족들에 대한 간섭이나 감시 등은 없었나.
한번은 처갓집에 정복을 입은 경찰이 찾아가 나를 찾았다. 장모님은 당시 나의 ‘과거’를 모르고 있었기에 굉장히 놀라셨다. 내가 이 사실을 알고 경찰서에 항의를 하자 경찰은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자주 있을 것”이라며 오히려 나에게 엄포를 놓은 적도 있다.
40여년이 흐른 뒤에 재심을 청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1989년 조갑제 기자가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라는 기사를 터뜨렸을 당시 여론은 ‘풀어주니까 이런다’라는 식이었다. 이로 인해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사건이 조작임을 결정하자 ‘이제는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해 제심을 청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