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85년 큰 별이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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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前 대통령 서거


DJ, 85세로 영욕의 생 마감...남북 화합과 한국 민주화 발전에 지대한 족적 남겨
3김 정치 낳은 지역주의 청산 기대, 국민, 정치권 “동서화합의 계기가 마련 될 길”

김대중 전 대통령은 18일 오후 1시43분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85세로 서거,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남북의 화합과 민주화란 커다란 족적을 남긴 그의 정치 역정은 한국의 해방 이후 현대사가 고스란히 투영된 삶이었다. 군사 정권시절 민주화의 선봉으로 나서 숱한 고초를 겪은 그는 대통령에 도전, 네 번째 만인 지난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돼 헌정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는 격동의 ‘IMF 외환위기’란 격랑을 헤쳐 나가고 분단 이후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란 열매를 맺는 등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이처럼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민족 통일과 민주화를 갈망 했던 김 전 대통령의 삶은 한국 민주사회의 지침서가 되었고 세계 여러 나라의 존경을 받는 위인으로 자리 잡아 이젠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인동초 같은 삶을 산 DJ

김 전 대통령은 1926년 1월 16일 목포 앞바다 섬인 하의도에서 소작농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 소학교 시절 때부터 불의를 못 참았고 근성과 용기가 다부진 꿈 많은 소년이었다. 큰 꿈을 안고 목포로 유학, 목포상고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졸업 후 해운회사 경영과 목포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며 사업가로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사업가의 성공을 뒤로 한 채 정치인으로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정치 입문은 그리 쉽지 만은 않았다. 1954년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목포에서 출마해 낙선했고 1960면 5대 민의원 선거까지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그의 7전 8기의 승부 근성으로 4.19혁명 이후 치러 진 1960년 인제 보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하게 되었다. 1960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첫 대통령에 출마한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총 6선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 전 대통령은 도전은 여기서 머무르지 않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권에 맞서 한국 민주화를 위해 대선에 뛰어 들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신민당 대선 후보에서 김영삼, 이철승 후보를 제치고 1971년 박정희 대통령(3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당시 대선후보 시절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연설에서 “이번에 또다시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되면 다시는 대통령 선거가 없는 총통시대가 올 것”이라고 독재정치 횡포를 경고했다. 그러나 대선 결과는 95만표 차이로 박 대통령에게 아깝게 지고 말았다. 1972년 3선에 성공한 박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말대로 장기 집권을 위한 ‘유신 헌법’을 제정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독재정치 타도’를 부르짖으며 한국 민주화를 성토한 김대중이 눈에 가시 되면서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등 위협을 가했다. 특히 1973년 김대중은 중정요원들에 의해 일본에서 납치돼 현해탄에 수장될 번 한 절대 절명의 순간에서 납치 5일 만에 미국 CIA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기도 했다.

또한 전두환 군부 시절 김대중은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과정에서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김대중은 민주화의 상징이 되면서 전두환 정권이 종식 되는 날 까지 망명, 감금, 투옥, 살해 위협 등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희생은 1987년 6.29선언을 이끌어 내면서 한국 민주공화국의 새 지평을 열게 되었다.

‘3김 시대 종식’이제 역사 속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는 50여 년 동안 한국 정치를 움직여온 3김 시대의 종결을 의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 일생에 있어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빼 놓고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이들 3김(DJ,YS,JP)은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정치현실을 온 몸으로 보여주면서 한국 현대 정치사를 좌지우지 했던 애증의 관계였다.

JP는 1961년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전면에 나섰고 DJ와 YS는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첫 대결을 벌인 뒤 경쟁과 협력 관계를 열었다.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도입으로 DJ와 YS, JP는 대통령을 향한 진념은 같았다. 1987년 DJ와 YS은 13대 대선을 앞두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자 DJ는 평민당을 창당, 대선에 출마했지만 YS 모두 군부정권 후계자인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JP 역시 충청권을 발판으로 도전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DJ는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세 번째 출마했지만 또 실패로 끝났다. 1990년 집권당인 민정당과 JP와 연대해 탄생된 민자당(민주자유당) 후보로 나선 평생의 라이벌 YS에게 또 다시 지면서 DJ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하지만 DJ은 대통령을 향한 꿈을 포기하기 않았다. 1993년 영국을 떠난 그는 다음해 귀국, 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해 이사장으로 활동하면서 정계 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게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DJ는 97년 대선을 앞두고 YS 민주계에 밀려나 자민련을 창당한 JP와 연대해 마지막 대선 도전에 박차를 가한다. 결국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현 자유선진당 총재)를 힘겹게 누르고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 되면서 계속된 4번의 도전이 마침내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얼마 못가 2001년 ‘DJP 공조’가 붕괴됐고 그 결과 DJ정권의 추동력을 저하시켰다.

이처럼 DJ와 YS, JP는 성공을 위해 전략적으로 협력하면서도 적대 관계를 가지며 한국 정치 50여년을 이끌었다. 이들의 3김 시대의 정치사는 한국 근대화, 민주화 성숙에 일조했지만 그 이면에는 지역주의와 금권정치라는 폐단을 남겼다. 정치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해 “3김 시대가 종결된 만큼 영남-호남의 지역감정,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국민 통합을 위한 변신이 필요할 때”라고 강조했다.

현대인의 지침서로 영원히...

김 전 대통령은 여러 차례 힘든 고비를 넘기며 한국 정치사상 여야 정권 교체를 이뤄 1997년 15대 대통령으로 당선 됐다. 김 전 대통령 집권기에 있어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한국 민주화의 상징처럼 집권기에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을 이끌어 냈다. 특히 인권법과 부패방지법,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보상법 등을 통해 민주화, 나아가 인권국가의 면모를 갖춰갔다.


경제적으로도 지난 정부의 과오인 IMF 외환위기를 2년 만에 극복하면서 한국 경제의 도약을 일궈냈다. 국민의 정부는 IMF 지원자금을 당초 계획보다 3년 앞당긴 2001년 전액 상환하고, 외환보유액을 40억 달러에서 1천억 달러 이상으로 확충한 것은 물론 기업.금융.공공.노동 등 4대 부문에 대한 고강도 구조개혁으로 경제체질을 개선했다.

특히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반목과 불식, 전쟁이 아닌 화해의 모드로 전환했다는 점은 그의 최대업적 중 하나다. 김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제시하면서 적대관계의 틀을 깨고 화해협력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햇볕정책 속에서 1998년 11월 금강산관광에 이어 금강산 육로관광이 시작됐으며, 경의선 철도 연결과 개성공단 건설도 추진됐다. 그 정점은 2000년 6월 평양에서의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었으며,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는 그해 말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그의 지대한 업적에도 불구, 정권 말기엔 대북송금 사건과 북핵문제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햇볕정책의 한계가 나타났고 심각한 국론 분열으로 이어지기 까지 했다. 또 두 아들을 포함한 측근들의 권력형 비리사건은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고, 신용카드 남발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가계부채, 부동산 투기 광풍, ‘벤처거품’이라는 부작용 등의 경제적 암초를 이후 정부로 넘긴 것도 김대중 시대의 과오이자 한계로 지적된다.

그러나 정치적 평가와는 별개로 인간 김대중은 비주류로서 주류의 냉대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 하며 도전에 나섰던 삶에 대한 태도는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침서가 됐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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