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유언대로 민주세력 단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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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비서실장 박지원 의원


병마에 맞서 싸우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기도와 눈물로 쾌유를 빌던 수많은 국민과 세계인들을 뒤로한채 2009년 8월18일 오후 1시43분 향년8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전국민과 세계인의 추모속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박지원 의원이 있었다. ‘잘나가던 재미사업가’에서 당시 군사정권에 탄압받던 야당인사의 오른팔이 될 것을 자임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태평양을 건너온 사람이다. 약 30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신’처럼 살아온 그는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까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통하는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까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DJ 마지막 길 묵묵히 지킨 박지원

박 의원은 지난 18일 김 전 대통령의서거 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다. 20일에는 동교동계 핵심 인사들과 함께 입관식을 지켰다. 이 자리에서 박 의원은 “서거하시면서 국민 통합의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조문단을 파견해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이어 “평소 그렇게 말씀하시던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 관계가 잘 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DJ에게 비서실장으로 마지막 보고를 했다. DJ 서거 이후 박 의원은 임시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을 지키며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DJ 퇴임 후에도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던 박 의원은 DJ가 지난달 13일 입원한 뒤 하루에도 몇 번씩 국회와 병원을 오가며 병상을 지켰고 눈을 감는 순간도 함께했다.

당 대변인 시절부터 새벽마다 동교동과 일산의 DJ 자택을 찾아 수첩에 깨알같이 메모를 하며 성실함을 인정받았던 그는 누구보다도 DJ의 의중을 잘 아는 ‘DJ의 입’으로 불렸고 참여정부 들어 대북송금 특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지난해 4.9 총선으로 정계에 복귀한 뒤에도 매일 동교동 사저를 찾아 정국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눌 정도였다. DJ는 총선 당시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목포에 무소속 출마한 박 의원에게 부인 이희호 여사를 보내 지원유세를 펼쳤고 당선되자 본인의 일처럼 기뻐했을 정도로 각별한 애정과 신뢰를 보냈다.

그는 DJ 서거 후 의료진과 함께 공식 브리핑을 한 데 이어 DJ측 대표 자격으로 장례형식 등 후속절차에 대한 정부측과의 조율 창구를 맡는 등 진두지휘하며 DJ 사후에도 비서실장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장례절차 문제 등을 놓고 자칫 정부측과 불협화음이 연출돼 ‘주군’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확정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선 최대한 발언을 자제하며 차분하게 현장 관리에 나섰다.

지난 20일 입관식 직후 이제는 고인이 된 DJ 앞에서 “이희호 여사를 잘 모시고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겠다”며 약 30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신’처럼 살아온 그는 김 전 대통령 비서진을 대표해 마지막 보고를 올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관식이 20일 오후 1시30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안치실 1층에서 엄수됐다. 고인이 생전에 다니던 서울 마포 서교동성당의 윤일선 주임신부가 집전한 입관식은 이희호 여사와 홍일·홍업·홍걸씨 3형제, 손자·손녀 등 가족 25명과 권노갑·한광옥·한화갑·김옥두 전 의원 등 측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됐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여사가 여러 해 전에 미리 준비한 흰색 수의를 입은 채 향나무로 만들어진 목관에 안치됐다. 목관의 양옆과 상판에는 대통령을 뜻하는 봉황무늬가 장식됐고 전·후면에는 무궁화가 상각됐다.

입관식에서 고인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공개됐다. 이 여사는 내내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장남 홍일씨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입관식을 지켜보았다. 윤 신부의 성서낭독 뒤 가족들은 차례로 고인에게 성수를 뿌리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이 여사는 편지를 담은 자서전 <동행>을 관 속 고인 옆에 내려놓았다.

박지원 의원은 김 전 대통령 비서진을 대표해 마지막 보고를 올렸다. “여사님 걱정은 마십시오. 저희들이 대통령님 모셨듯이 여사님을 모시겠습니다. 국민 통합의 길이 열렸고 북한에서도 조문단을 파견했습니다. 대통령님께서 평소에 그렇게 말씀하시던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잘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박 의원을 비롯한 김선흥·윤철구·최경환 등 비서관들은 내내 울먹였다.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생애의 마지막 나날을 기록한 일기가 21일 공개됐는데 그 내용에는 유족들이 노 전 대통령 장례에 대해 가족장을 원했던 것과 관련, “박지원 의원을 시켜서 ‘노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살았고 국민은 그를 사랑해 대통령까지 시켰다. 그러니 국민이 바라는 대로 국민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했는데 측근들이 이 논리로 가족을 설득했다 한다”(5월 24일)고 적었다.
특히 박 의원은 유족과 정부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해 DJ의 국장을 성사시켰고, 북한 특사 조의단의 방문도 앞장서 조율했다.


박지원 “DJ 최후 말씀은 야권 단합”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인 박지원 의원은 고인이 야권 단합을 통해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문제의 위기를 극복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밝혔다.


박 의원은 지난 24일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당은 정세균 대표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야4당과 단합하라. 모든 민주시민사회와 연합해서 반드시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문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승리하라’는 그런 말씀이 계셨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따라서 이런 말을 저에게 하신 것이 저는 유언 중에 하나라고 정 대표께 보고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국장 중에 민주당사를 경유하시면서 이희호 여사가 하차해 대표께 감사의 말씀과 이런 말을 하기로 했는데 민주당 의원과 당원들이 서있는 것을 보고 울컥해 눈물이 나서 말씀을 못하고 그냥 승차했고, 그래서 (서울광장) 문화제에 참석해 국민에게 감사와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의원은 26년 전 김 전 대통령(DJ)과 인연을 맺은 이후로 DJ의 그림자처럼 살아왔다. 때문에 그에게 붙여진 별명 또한 ‘그림자’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불린다.
전남 진도출신인 그와 DJ와의 인연은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지원(67·민주당 목포·재선) 의원은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럭키금성에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으로 이민간 그는 사업에 성공해 뉴욕 한인회장까지 올랐다.

그가 뉴욕 한인회장이던 당시 미국으로 망명 온 김대중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87년엔 급기야 미국생활을 접고 DJ 대선캠프에 합류하면서 국내 정치무대에 뛰어들었다. 잘나가던 재미사업가가 가혹하게 탄압받던 야당인사를 따라나섰다는 사실은 쉽게 선택할 일이 아니다.
박 의원은 92년 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된 뒤 대변인과 언론특보 등 DJ의 언론관계 업무를 도맡았다. 야당 대변인 최장수 기록(4년1개월)을 세우기도 했다.

영원한 DJ 비서실장

1998년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자 그는 초대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출발해 문광부 장관, 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비서실장 등으로 변신하며 김 전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했다. 그에겐 자신의 삶보다 DJ의 삶이 더 우선해보였다. 아니 그의 삶은 DJ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DJ의 변함없는 신임에 그는 국민의 정부 시절 내내 화려한 이력 속에서 살았으나 견제와 질시도 끊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권력’이 피해갈 수 없는 명암을 그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낙마와 재기의 반복이 그 같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98년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자 그는 초대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출발해 문광부 장관, 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비서실장 등으로 변신하며 김 전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했다. 그에겐 자신의 삶보다 DJ의 삶이 더 우선해보였다. 아니 그의 삶은 DJ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2000년 9월 한빛은행 불법대출 연루 의혹으로 야당 및 당 쇄신파로부터 퇴진압력을 받아 문광부 장관직에서 낙마했다가 반 년만인 2001년 3월 정책기획수석으로 재기했다.

그는 정책기획수석 시절 청와대 실세로 부각돼 ‘왕수석’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이후 몰아닥친 정풍파동 속에서 쇄신대상으로 지목됐고, 결국 같은 해 11월 DJ가 당 총재직을 사퇴하자 같은 날 미련 없이 청와대를 떠났다.

수석을 그만둔 뒤 서울 시청 앞에 사무실을 내고 조용한 시간을 보냈으나, 석 달도 안 돼 정책특보란 이름으로 또 다시 부활했다. 이어 국민의 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명명됐을 때는 “또 박지원이냐” “지겹다, 박지원”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수많은 이들에게 ‘DJ에게 믿을 사람은 오로지 박지원 한 사람’으로 비춰졌다.

박 의원의 가장 아픈 시절은 그 어느 때보다 2003년부터 구속 수감됐을 때일 듯하다. 문화관광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으나 정권교체 후 대북 송금과 관련해 5년간 옥고를 치렀다.
참여정부 때 실시된 ‘대북송금특검’ 당시, 그는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대북 송금 과정에서 현대비자금 15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그는 사면될 당시 “바람에 진 꽃이 햇볕에 다시 필 것”이라며 부활을 예고했다. 그리고 18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목포에 출마해 당선되고 이후 민주당에 입당함으로써 정치적 재기를 했다.
구속되면서 억울함을 일관되게 호소했을 때 김 전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모함과 고통을 당하는 것을 억울해하지 말고 이겨내라”며 그를 위로했다.

83년 이후 그는 김대중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병원에서 DJ를 지킨 사람도 바로 그 ‘비서실장’이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영원한 비서실장’, 오로지 DJ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정치인생, 죽음과 부활을 반복해온 강철 같은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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