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이 8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지난 2001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문제 연구가 고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편찬 위원회를 꾸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발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던 것. 인명사전 등재를 막기 위한 후손들의 이의신청과 소송이 이어지면서 예정보다 1년이나 지나서 발간된 데다 발간이후 보수단체의 항의 집회로 발간 보고회 장소가 갑작스레 옮겨지는 등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거기다 발간에 대한 반응 역시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어 진통이 예상되고 있는 것. 일부 후손들의 경우 명예훼손 소송을 준비하고 있는데 반해, 친일재산 매각대금을 국가에 자진 반환한 사례도 있어 여러 가지 파장이 일고 있다. 이에 본지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둘러싼 엇갈린 양심을 파헤쳐봤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백범 김구선생 묘소 앞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보고대회’를 열고 식민지 시절 일제에 협력한 인물들의 행적을 담았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간되는 3권의 사전은 친일문제연구총서 가운데 ‘인명편’에 해당하는 것으로 총 28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는 식민지 시절 일제에 협력한 인물 4389명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8년 만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 식민지 시대 일제에 협력한 4389명의 행적 담겨
3만명의 시민들 7억원의 성금모아 동참, 보수단체 반발과 항의로 발간 장소 옮겨
민간차원 ‘친일인명사전’ 박 전 대통령 포함, 정부차원 ‘친일반민족행위자’ 제외돼
사전 등재 막기 위한 후손들 이의신청·소송, 친일재산 매각대금 국가에 자진 반환
하지만 이 중에는 독립유공자 20명이 포함돼 있을 뿐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장면 전 국무총리, 언론인 장지연, 무용가 최승희, 음악가 안익태, 홍난파, 현상윤 고려대 초대 총장 등 유력 인사들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엇갈린 양심1. 동참 VS 반발
먼저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기 전까지의 상황을 보자. 거센 논란과 방대한 자료만큼이나 준비기간도 길었던 발간작업은 지난 2001년부터 시작돼 장장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각분야의 교수와 학자 150여명이 편찬위원회로 구성됐으며 분야별 전문가와 집필위원 또한 180여명에 달했던 것.
거기다 문헌자료 수집과 정리, 색인 입력, 검수작업에 참여한 연구자 80여명과 친일인명사전 편찬 주간연구소인 민족문제연구소의 5000여명의 회원들이 동참해 책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난 2004년에는 정부가 예산 지원금 5억 원을 삭감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임헌영(68)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시민들이 불과 열흘 만에 5억원의 성금을 모았다. 그 이후 계속 성금이 답지해 결국 7억 원의 성금을 모아 발간 비용을 대줬다”며 “3만 여명의 시민들이 아니었다면 역사정의 실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렇듯 민족문제연구소는 전화위복을 겪으며 지난 11일 친일인명사전 발간보고대회를 8년만에 열수 있었던 것. 이날 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 근현대사 금기의 영역이 최초로 공개됨으로써 최근 만연하고 있는 퇴행적 역사인식에 경종을 올리고 성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며 “우리 내부의 부끄러운 역사를 고백하고 용기 있게 진실을 대면함으로써 상식이 통화는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들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역사적 과제를 시민들의 힘으로 해결한 사례는 없었다”며 국가가 외면한 미해결의 과제를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역사정의 실현의 단서를 열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의미 있는 성과“라고 밝혔다.
또한 대회에 참석한 독립유공자 후손이기도 한 장병화씨는 “그동안에 자식으로서 도리를 못했다”며 “오늘 같은 일은 참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날 책의 발간을 반대하는 보수단체의 항의와 집회로 발간 보고회 장소가 갑작스레 옮겨지는 등 혼란을 빚었다. 국론통합운동본부, 나라사랑실천운동 등 20여개 보수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민족문제연구소의 해체를 촉구했던 것.
이들 단체는 “민족문제연구소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고 정략적 목적에 의한 친일조작, 역사왜곡으로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을 음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사전에 이름이 오른 인사들의 선정 기준이 편파적”이라며 “민문연은 인민재판을 중단”하라고 반발해 논란이 일고 있다.
엇갈린 양심2. 넣고 VS 빼고
사실 가장 큰 논란의 화두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혈서를 쓰고 만주군에 지원했다는 내용의 옛 신문기사가 지난 5일 공개되면서 논란에 불을 지핀 것.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날 공개한 ‘만주신문(1939년 3월31일자)’ 기사의 사본 제목은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다.

이 기사는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돼 계원을 감격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기사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 중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로 일차 탈락했다”면서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돼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됐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기사는 박 전 대통령이 동봉한 편지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며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적었다고 전했던 것.
사실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러한 내용의 기사를 공개한데에는 박 전 대통령의 아들인 지만씨가 지난 10월28일 부친 이름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후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본질이 흐려지고 정치쟁점화하고 있는 데에 따른 민족문제연구소 나름의 조치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닌 게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는 “관련 보도가 나간 뒤에는 연구소에 욕설 전화가 끊이지 않아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며 기사 공개 배경을 설명했다.
연구소는 이어 “박 전 대통령 자신의 언행이 담긴 객관적인 원사료를 공개함으로써 불필요한 논란 확대를 막고, 이성적인 토론으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면서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일본군 현역 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복무했기 때문에 친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옳지 않다”며 친일인명사전에 박 전 대통령을 포함한 것은 정당한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최근 민간차원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는 박 전 대통령과 위암 장지연이 정부차원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제외된 것으로 전해져 또 다른 논란이 일고 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오는 30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705명의 명단을 새로 발표한다고 지난 10일 밝혔지만,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논란이 된 박 전 대통령과 위암 장지연은 명단에서 제외된 것으로 전해졌던 것.

물론 규명위는 명단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나 장지연을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고 유족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져 벌써부터 파문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규명위 관계자는 “민족문제연구소는 인물의 전체 이력을 중심으로 친일행적을 살폈지만 규명위 심사는 구체적 행위가 관련법상 명백한 반민족행위인지를 따져 좀 더 엄격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번 조사가 정부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정부가 일부 친일인사에게 면죄부를 줬다는 지적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어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엇갈린 양심3. 소송 VS 반환
사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인명사전 등재를 막기 위한 후손들의 이의신청과 소송이 이어지면서 예정보다 1년이나 지나서 발간되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더욱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 보고대회를 열기로 하자, 박 전 대통령과 위암 장지연 후손 등이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이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8일 공개하기로 한 친일인명사전 명단에서 이름을 빼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북부지법 민사13부는 지난 6일 박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사전에 박 전 대통령을 수록하는 것과 사전의 배포를 금지해 달라는 내용의 가처분신청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출생부터 사망까지를 구체적 사실로 개념 지을 수 있는 주요 경력에 대해 서술하고 있으며 참고문헌을 상세히 명시했다”며 “사실의 진위여부는 본안소송으로 충분히 확인 가능하다”고 밝혔던 것.
북부지법 민사12부 역시 이날 위암 장지연의 후손과 기념사업회가 낸 게재 및 발행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장지연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게 된 것은 그가 매일신보에 게재한 다수의 글 등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허위사실에 기초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던 것.
이에 박 전 대통령의 소송을 맡고 있는 박진흠 변호사는 “단지 군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선정 기준 자체에 논란의 여지가 있지 않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등의 친일 행적이 거론된 것과 관련해 보수단체들도 ‘정치적 모략’이라며 민족문제연구소를 공격했다.
하지만 소송을 거치지 않고 친일재산 매각대금을 국가에 자진 반환한 사례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친일행위자 고희경의 후손들이 물려받은 땅의 매각대금을 지난 9월 소송 없이 국가에 반환한 사실을 지난 12일 밝혔다.
고희경은 정미 7조약과 한일합병조약 당시 탁지부 대신이었던 고영희의 아들로, 1916년 아버지의 자작을 이어받은 뒤 1920년 백작으로 승작한 인물이다. 사실 친일재산조사위에 따르면 고희경의 후손 중 일부는 지난 2006년 2월에서 10월 사이 물려받은 땅 2만4천800여㎡를 4억8000여만원에 매각했다.
이에 친일재산조사위가 이 땅에 대해 지난 2008년 11월 ‘친일재산 확인결정’을 내렸으나 이미 제 3자에게 팔린 상태라 후손들 소유의 다른 부동산에 가압류 신청을 한 것. 그러나 고희경 후손들은 친일재산조사위와 재산 반환 절차를 협의해 법적 분쟁을 거치지 않고 국가에 당시 매각대금을 반환한 것이다.
더욱이 고희경 후손의 재산 반환 이후 또 다른 친일행위자 후손도 화해계약을 통해 약 2700만원을 국가에 반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친일재산조사위는 “이번 사례는 친일재산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다른 친일 후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고 과거사 청산을 통한 국민통합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고 지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 [미니인터뷰]
“사실만을 담았다”

친일인명사전 발간보고대회가 지난 11일 열린 가운데 인명사전에 등재된 이름과 그 내용이 일부 공개되며 파장이 일고 있다. 이에 본지가 지난 19일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을 만나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을 들어봤다.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소감은, 발간을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은데.
사실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 친일문제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을 정부가 아닌 민간차원에서 나서서 청산하려하는 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을 것이다. 반성안하는 것도 문제지만 침묵이나 무관심 또한 양심을 저버리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어쩌면 경제 불황과 맞물려 '박정희 향수'가 다시 살아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먼저 반성해야 된다.
유독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혈서부분을 공개한 이유는.
발간 보고회에서는 가급적 개별사안이나 인물의 언급은 피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박 전 대통령의 아들인 진만씨가 송을 걸어왔다. 그러면서 언론에 알려지게 된 것이고 우리 또한 그 부분이 계속 논란이 되니까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민간신문에 실린 박 전 대통령의 혈서부분을 공개하게 됐다.
일각에서는 소위 ‘박근혜 죽이기’에 동참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등 정치적인 의도를 의심하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
정치적인 의도가 있을 리 없다. 무엇보다 시차적으로도 맞지 않는 이야기다. 우리가 처음 친일인명사전의 초안격인 ‘청산하지 못한 역사’라는 책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이름을 언급한 94년 당시, 박근혜 의원은 정치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아무런 얘기도 없다가 박근혜 의원이 정치적으로 조명을 받는 지금에 와서 그러한 말이 나오고 있어 우리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
혹시 박 전 대통령과 장자연 선생 등의 후손 말고도 발간이후 소송이 들어온 게 있는가.
현재까지는 없다. 물론 책이 보급되는 12월 말 이후 소송이 들어올 수도 있다고는 본다. 예컨대 조선일보(방응모 전 사장)나 동아일보(창업주 김성수)의 경우 지더라도 해야 되는 소송일 지도 모른다. 안 그러면 그냥 인정해 버리는 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력인사로 알려진 두 사람의 소송의 기각 돼 오히려 역으로 소송이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책에 자신이 있다는 얘긴가.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만든 책이다. 1차 명단을 발표했을 당시 후손들로부터 항의 전화가 왔지만 명단 공개이후 이의제기할 시간을 만들어줬다. 사실 기간을 정해두고 이의제기를 받기는 했지만 언제라도 이의제기를 할 수 있게 했다. 책이 발간하기 바로 전날까지도 이의제기가 들어왔고 그것 역시 다 받아들여줬다. 우리는 평전을 만든 것이 아니다. 책의 제목 그대로 사실만을 담은 사전을 만들었고 이 책이 역사적 토대가 되길 바란다. 무엇보다 그간의 소송을 통해 우리가 밝혀낸 새로운 사실도 있어 오히려 그러한 이의제기나 소송을 통해 책의 내용이 발전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