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표한 여자 연예인 인권상황에 관한 실태보고가 거센 후폭풍을 몰고 오고 있다. 참담한 연예계의 현실에 일각에선 “제2의 장자연이 나오는 것 아니냐?” 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 꿈 많던 여배우의 자살은 사회의 큰 파장을 몰고 왔으나 경찰의 변죽만 울린 채 제대로 밝힌 것 없이 끝났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여성 연예인의 심각한 인권 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여성 연예인의 ‘성적 자기결정권’,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 등 인권 침해가 수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여성 연예인을 성적 대상으로 보면서도 한편 으로는 순결하기 원하는 이중적인 사회의 시선이 그들을 어둠으로 내 몰고 있지는 않은지 본지가 취재해봤다.
인권위, 여성 연기자 절반 이상이 ‘유명인사와 만남’제의 받아
“연예계, 스폰서 없이 성공하기도 어렵다”고 답하기도
“이쪽 일 하려면 남자를 알아야한다면서 모텔로 끌고 갔어요”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지난 27일 발표한 ‘여성 연예인 인권상황 실태조사’ 내용 중 20대 여성 연기자의 피해 사례이다.
인권위는 장자연 사건을 계기로 지난해 9월부터 4개월에 걸쳐 여성연기자 111명과 연기자 지망생 240명 등 총 351명을 대상으로 여성연예인의 인권 상황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이 결과 일각에선 “여성연기자의 인권 침해 문제가 비단 신인 연기자였던 故장자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며 덧붙여 “또 이대로 끝나서는 안된다. 해결책을 간구해야 한다”고 여성 연예인의 인권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토로했다.
“제 2의 장자연 나오나?”
지난 3월7일은 故장자연의 1주기였다. 신인 배우 장자연은 “저는 힘없고 나약한 신인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고 시작하는 문건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문건에는 소속사 대표의 성상납, 술 접대 강요, 폭행 등 연예계의 추악한 모습이 담겨있었다. 장씨는 문건에 “어느 감독이 골프 치러 올 때 술과 골프 접대를 강요받았다. 룸살롱에선 술 접대를 시켰다. 끊임없는 술 접대 강요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고 있다. 접대해야 하는 상대에게 잠자리까지 강요받았다.”고 밝혔다.
문건에 장씨는 성상납 외에도 “방안에 가둬놓고 손과 페트병으로 때리는 등 수많은 폭력과 욕설을 당했으며, 수입이 적은 신입배우임에도 매니저 월급까지 책임져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둠속에 묻혀 있던 여성연예인에 대한 인권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는 듯 했으나 경찰의 변죽만 울린 채 증거부족 등으로 밝혀진 것 없이 그대로 마무리 됐다.
일각에선 “이번 인권위의 실태조사가 발표만 있고 해결책이 없다. 1년 전 장자연 사건처럼 의혹만 무성한 채 흐지부지될 것이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나타냈다.
인권위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여성 연기자의 55%가 ‘유력 인사와의 만남 주선을 제의 받았다’고 답했으며, 60.2%가 ‘방송 관계자나 사회 유력 인사에 대한 성접대 제의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20대 초반의 연기자 지망생은 설문지에 "친구가 나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아빠같은 분이 나랑 애인 할래 이렇게 물었다"며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주고 나는 너의 젊음을 사겠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그동안 쉬쉬하던 연예계 스폰서 문제가 실태조사에서 확인됐다. 보고서에 따르면 스폰서 제안 등은 주로 연예인 지망생이나 신인시절에 집중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예계 관계자는 “스폰서 관계가 일회적인 성적인 거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제공하는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 했다. 한 응답자는 “사실상 스폰서 없이 이쪽에서 성공 하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그 밖에도 몸이나 외모에 대한 평가(67.3%), 듣기 불편한 성적 농담(64.5%), 몸의 특정 부위를 쳐다보는 행위(58.3%), 술시중을 들라는 요구(45.3%) 등 성희롱 및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받은 경험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조사대상 연기자 중 31.5%는 신체의 일부(가슴, 엉덩이, 다리 등)를 만지는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배우 유인나는 SBS의 방송 프로그램에서 과거 무명시절 전 소속사의 유명가수 출신인 이사에게 성추행 당했던 일을 고백했다. 유인나는 “집 방향이 같아 이사님이 집까지 태워다 주셨는데 집 앞에서 입술에 키스하려고 했다. 너무 놀라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그분의 입술이 볼에 닿았다.”며 상황을 전했다. 이어 당황한 유인나에게 이사는 “엄마한테 얘기하지마라”는 말을 하고 갔다며 힘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직접적으로 성관계를 요구받거나(21.5%), 성폭행·강간을 당한 사례(6.5%)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성접대 제의를 받았다고 응답한 사람 중 48.4%가 '이를 거부한 후 캐스팅이나 광고출연 등 연예활동에서 불이익을 경험했다'고 답해 연예계에 만연한 인권침해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냈다.
20대 중반의 연기자는 “소속사의 요구로 식사자리, 술자리 등에 여러 번 불려나간 적이 있어요. 느끼하고 매우 불쾌한 상황이었어요. 언급조차 불쾌 하죠”라며 심층면접에 응답했다.
“여성 연예인으로 살기 힘들어”
인권위는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 침해 역시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보고서의 결과에 따르면 여성 연기자 지망생중 72.3%는 다이어트를 권유받고, 성형수술 권유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58.7%로 나타났다. 그리고 여자 연기자중 54.6%가 다이어트 권유를 받았고 55.6%가 성형수술 권유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소속사 사장은 가수로 데뷔하는 누구나 호감을 가질 것 같은 외모를 가진 제니(김아중 분)에게 성형을 권유한다. 소속사에서 성형을 강요하는 상황은 영화 속 이야기만이 아니라 실제 연예계에 팽배해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보고서에 나온 20대 연기자는 “‘너 짝눈이다. 눈 조금만 더 손대자.’며 회사에서 주로 성형을 시키고 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라고 응답했다. 또 다른 20대 초반 연기자 역시 “저는 제가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데 회사에서 너는 뭐가 문제야, 너 언제 할거니, 살은 언제 뺄 거니, 정말 그런 압박이 심해요”라고 답했다.
인권위는 “여성연기자 인권침해 실태의근본적 원인으로 가부장적적 성문화와 연예인 수급구조의 불균형이 지적되고 있으나 이와 같은 문화적·산업적 요인이 기획사, 매니지먼트사, 제작사, 언론과 대중에 의해 확대·심화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밝혔다. 덧붙여 “연예매지먼트 진흥법 등 법제마련, 관계자 협의체 구성, 여성연예인의 자구노력 등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전문가는 "공정거래위원회의 표준계약서 도입, 한국매니지먼트협회의 회원사 매니저에 대한 교육과 라이센스제 실시, 캐스팅의 투명한 시스템 구축노력 등 나름대로 연예계 병폐를 개선하기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부족한 실정이다. 연예계 병폐 근절을 위한 철저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고 말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보고서에 적힌 해결 방안은 미약하다. 무엇보다 여성 연기자들 대다수가 성 접대 제의를 받는 이들로 비치는 ‘불명예’를 짊어지게 됐다.”며 “인권위가 여성연예인 인권실태조사발표에 앞서 좀 더 신중했어야한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