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한방울 까지도 당신을 위해 살꺼야” 라고 아내에게 말했던 조세형이 5월10일 장물알선 혐의로 연행 됐다. 이에 세간이 또다시 들썩 거렸다. 왜곡된 여론에 그의 아내였던 이은경씨는 또 피멍이 들었다. 유망한 사업가에서 조세형의 아내로 그리고 초연스님으로 살아가는 한 여자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촉망받는 사업가에서 조세형의 아내로 그리고 초연스님이 되기까지
“조세형 마음이 여리고 순수, 정의롭게 살려 했지만…”
“지인의 아내 수술비 때문에 이번 범행 저질러” 주장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봄 기운이 완연한 저녁 초연스님을 만나러 갔다. 신사동에 위치한 구룡사에는 대도 조세형의 아내로 살았던 이은경씨가 있었다. 그녀는 하얗고 작고 말랐으며 청초했다. 사람 좋은 미소로 기자를 응대했다.
‘어떻게 저 갸녀린 몸으로 그렇게 모진 삶들을 강인하게 버텨왔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넋을 놓고 있는 기자에게 웃으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요?” 라고 입을 열었다. 그녀의 옅은 미소 뒤에 깊은 애환이 흘렀다.
“죽어도, 피한방울 까지도 당신을 위해 살꺼야”
조세형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가?
작년 12월 우연히 지나가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은 내가 삭발하기 전날이었다. 조계종에 승복을 찾으러 갔다가 그분이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는 것을 봤다. 지금 기자님하고 나하고 거리보다 조금 먼 정도였다.(1m 정도의 거리) 그분을 부를까 하다가 멈췄다. 내일 삭발하는데 할 말도 없고, 인연을 온전히 놓아야겠다 싶었다. 그분은 사업에 실패하고 낙심한 마음에 혼자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그 길은 내가 평소 많이 다니던 길이었다.
삭발 하시는 날 조세형씨도 왔었나?
삭발하는데 그 분은 오시지 않았다. 대신 아이가 왔었다. 아이가 많이 울었다. 엄마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것이 충격적이었나보다. 하지만 굳게 마음먹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중생을 구제하며 묵묵히 좋은 일을 하며 살리라 다짐했다. 3년은 최선을 다할 것이다. 예전에 그분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당신이 기독교에서 선교를 못하니 내가 불가에서 포교를 하겠다” 고. 그 분은 “뭘 해도 좋으니 배신만 하지 말라” 고 대답했다.
이혼은 언제 했나? 이유가 뭐였나?
작년 2월에 이혼을 했다. 아이가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불가피했다. 조세형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감춰야 했다. 대도라는 타이틀이 아이에게까지 내려갈 것 같았다. 아이는 명석해서 성적도 상위권에 있고 심성이 곱고 착한편이다. 아이 하나를 놓고 보면 손색이 없는데, ‘대도 자식’ 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말이 달라진다.
종교적 갈등은 없었나?
그분이 안(교도소)에 있을 때 이 길을 가게 돼서 상의를 못했다. 나중에 알고 실망하고 많이 울었다고 들었다. 그분에게 올해 들어 “당신 사람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겠다” 며 안좋은 산재를 막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말했다. “나는 기독교인이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거 하면 안돼요” 그 분은 기독신앙이 뿌리 깊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이야기들이 맞고 또 맞고 하니깐 믿어줬다. 그리고 “스님으로 곧은 자세로 가세요” 라고 나를 배려해줬다.
조세형씨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분은 곧은 성격이었다. 제대로 유흥을 즐겨 본적도 없다. 그저 김치 하나만 주면 밥을 맛있게 먹었다. 자신을 위해 먹고 쓰지를 않았다. 시장에서 만원짜리 바지 하나에 잠바 걸치면 그만 이었다. 순수하고 마음이 여렸다.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왜 자꾸 범행을 저지른 것 같은가? 습관이라는 소리도 있던데?
습관이 아니다. 그 분은 워낙 마음이 여리고 배려심이 깊다. 아내와 자식은 두 번째였다. 그분은 어렵고 힘든자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 분 주변 사람들은 힘들면 찾아와서 “형님 도와주세요” 라면서 사정한다. 그럼 그분은 또 그걸 받아준다. 어지간한 살림으로는 뒷바라지 하기도 힘들 정도로 주변을 챙긴다. 사실 이런 것 들 때문에 의견충돌이 있었고 이혼까지 오게 된 점도 있다.
최근 장물 알선혐의로 송치된 것을 아나? 내연녀와의 생활비를 벌려고 했다는데?
알고 있다. 그러나 왜곡된 보도이다. 이 사건 역시 수 십년지기가 “자신의 아내가 수술을 하는데 돈이 필요하다” 고 부탁해서 모른 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마하고 그저 아는 사람끼리 소개를 시켜준 것 인데 이렇게 과장이 된 것이다. 그분이 또 총대를 맺다. 그리고 1000만원 때문에 그런 일을 할 분도 아니고 준다고 해도 받을 분도 아니다. 그 분은 이제껏 내가 준돈 이외는 받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렇게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지도 않고, 아이 아빠를 내가 그렇게 두지도 않는다. 이렇게 또 다시 언론에서 떠들어 대서 저번 ‘서교동 치과의사 집’ 사건처럼 형량이 더 커질까 염려된다.
(실제 본지가 영등포 경찰서에 확인해 본 결과 조세형씨는 내연녀와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1000만원을 받았다는 진술을 한 바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면회에 가볼 생각은 없나?
사실 어제(5월17일) 갔었다. 그러나 끝내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를 보면 괴로워 할 것 같아 그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분이 날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한번은 갈 예정이다. 그 분은 또 다른 피해자이며 약자이다. 용기 내라고 전하고 싶다. 사실 저번에 갔을때도 그분은 괴로워했다. 생을 마감하고 싶어 했다. 사회에 나오면 사람들을 돕게 해주겠다며 용기를 줬었다.
한번 엄마는, 영원한 엄마
한번 엄마는, 영원한 엄마
아이는 지금 누가 키우고 있나?
아이는 이모집에서 자라고 있다. 아이의 학군을 바꾸고 개명까지 했다. 아이가 왜 이름을 바꿔야 하는지 성은 왜 바꾸는지 항의를 해왔다. 친구들이 예전 이름이 더 낫다고 했고 자신도 그렇다면서 고집을 피우더라.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재 학교에선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아이한테도 아빠의 이름을 언급조차 못하게 시켰다. 아빠가 외국에서 사업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면서 설득하니 아이는 이해했다. 착한 아이다.
아이와는 자주 연락 하나?
엄마의 정을 그리워하는 아이와 잠들기 전 밤마다 통화를 한다. 내가 “스님이라도 한번 엄마는” 이라고 말하면 아이가 “영원한 엄마”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난 또 “엄마의 딸랑딸랑은” 이라고 하고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난 늘 아이가 밝고 사회성이 풍부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에게도 매일 친구들에게 좋은 겪언이나 속담을 말하게 하고 확인한다. 인사도 늘 먼저하라고 교육한다. 다행히 아이는 전학가서 회장선거에 출마하는 등 활달하게 지내고 있다.
아이는 아빠에 대해서 알고 있나?
사실 아이는 6살이 돼서야 한국말을 했다. 어렸을 땐 외국인들을 집에 상주하게 하면서 아이를 키웠다. ‘대도’에 ‘대’자도 못 듣게 하기위해 일부러 한국말은 가르치지 않았다. 아이는 ‘아빠’라는 존재도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전에는 애초에 아빠라는게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게 키웠다. 그러다 초등학교 입학 후 “아빠가 뭐냐”고 물었다. 한국말이 서툰 아이는 “아빠는 어딨냐?” 는 의미였던 것 같다. 난 그제서야 아빠는 낳아주신 분이시고 지금은 외국에서 사업을 하고 계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믿던가?
아이가 믿게 하기 위해 시험을 잘 보거나, 축하할 일이 있으면 해외에서 아빠가 선물을 보낸 것처럼 한다. 아빠가 기뻐서 미국에서 최근 유행하는 장난감이나 인형 등을 선물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철저히 지금까지 숨기며 걸어가고 있다.
아이가 언젠가는 아빠에 대해 알게 되지 않을까?
사실 아이는 4개국어를 한다. 영어,일본어,중국어,한국어를 한다. 외국으로 보내기 위해 가르쳤다. 하지만 아이는 해외에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해외에 나가서 잘 적응 할 수 있을지도 염려된다. 그러나 이제 곧 사춘기도 올텐데 여기서 키울 자신이 없다. 박지만씨처럼 우리 아이도 그 길을 갈껀데 가슴이 아프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던 말이 와닿는다. 우리 아이도 그렇게 될까 두렵다.
요새 또 다시 조세형씨의 이름이 언론에 떠올랐는데 아이는 모르는가?
아이는 전혀 모른다. 중간고사 기간이라 현재 공부에만 몰두하고 있다. 혹시나 인터넷을 볼까봐 컴퓨터도 금지령을 내렸고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온다. 아이가 시험을 잘 보면 자장면을 사먹으라고 용돈을 줬는데 자장면대신 컵라면을 사먹으며 돈을 모아 게임기를 샀다. 요새는 공부하거나 휴식시간에 그 게임기를 가지고 논다.
인터넷이 발달해 한번쯤은 봤을 것도 같다?
어느 날 아이의 담임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아이가 “자살하고 싶다” 고 했다는 것이다. 큰 충격이었다. 티 없이 밝게 키우기위해 노력했는데 아이 입에서 그런 끔찍한 말이 나왔다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사실 아이가 크게 발칵 뒤집어져 운적이 있다. 인터넷에 그분이 대도니 밀항선을 탔느니 허위 사실들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아이가 그 기사를 본 것이다.
평소 세상에서 가장 나쁜놈은 ‘도둑놈’ 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자신의 아빠가 도둑이라니 얼마나 큰 혼란과 충격이었겠는가? 이런적도 있다. 내가 집에 없을 때 형사들이 찾아와 “여기가 대도 조세형의 집이 맞느냐?”, “네가 조세형의 아들이냐” 등의 소리를 해서 아이가 크게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며 설명했고 아이는 다행히 안정을 찾았다.
여자의 일생?
가장 힘든 순간이 언제였나?
사실 ‘대도’ 라는 타이틀이 나를 삭발까지 몰고 가게 했다. 대도 조세형을 남편으로 맞았던 내가 가야 할 길이라 여기고 묵묵히 고행의 길을 수행하고 있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말할 수 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 점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해 중생을 구제하고 좋은 일을 하며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철야기도를 24시간 수행한다. 하루에 잠자는 시간은 신도들과 있다가 잠깐 졸거나, 차안에서 조는 정도가 전부이다. 그런데 기사에서 아빠는 대도에서 소도로, 엄마는 무속인으로 비쳐질 때 내 아이가 이를 보고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인터뷰도 한 적도 없는데 한복입고 무당처럼 나와있는 사진과 글들이 돌아다닌다. 종단에는 스님으로 되어 있는데 언론에는 무당으로 되어 있더라. 기가 막힌다. 아마 이 길을 가지 안았더라면 자살하고 싶었을 것이다.
힘든 순간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는가?
다행히 도량과 인덕이 많아 신도들이 위안을 준다. 오늘도 신도가 자신에게 작다며 내 머리에 모자를 씌워줬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살고 가시는 스님을 보면 기운이 난다” 며 내 손을 잡고 차 한잔 마시자고 한다. 다 나에게 용기를 주기 위함이다. 지인들도 술을 못하는 내 대신 술을 마셔가며 위로한다. 밖에서 지금 기도중인 분도 학교 선생님이신데 내가 걱정되어 저렇게 와서 기도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삶이란 이런 것이다.
어떻게 지낼 것인가?
아프리카 무역 사업과 함께 아프리카에 복지재단 건립을 진행 중이다. 사실 이번에도 그분의 길머리를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이 일이 터진 것이다. 그래서 더 속상하고 아쉽다. 그분과 아이와 함께 외국으로 나갈 생각도 했었다. 그분이 “당신 이번에 나가면 안들어 올 것 같다” 며 만류해 잠시 미루기도 했었다. 그런데 최근 다시 추진 중이다. 이 길을 들어서기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여가가 없다. 도와야 할 어려운 사람들, 같이 기도해야 할 신도들 바쁘게 지내고 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초연스님은 10년만에 꺼내 보는 거라며 앨범, 신문 스크랩북 등을 한보따리 내놓았다. 그 앨범 안에는 사진 하나하나에 글말이 달아져 있었다. 지극한 사랑과 정성, 짧았던 행복이 담겨져 있었다.
어느새 초연스님의 코끝은 빨개져 있었고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있는 강인한 여성이 아닌 그저 연약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깊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이 순간으로만 돌아간다면 가고싶다. 이때는 이런 삶이 펼쳐질 거라 예상 못했다” 그리움이 공기 속에 녹아 흘렀다.
사진 하나하나를 설명했다. 조세형씨가 태어난지 100일도 되지 않은 아들을 안고 있는 사진을 보며 “그분은 늦은 나이에 자손을 보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어요. 행여 병균이라도 옮을까 숨도 쉬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아이를 안았죠” 그 사진에 ‘바라만 보아도 좋은’ 이라는 글말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조세형씨는 아이의 돌도 보지 못한 채 수감되었고 지금 껏 아이를 만져 보지 못했다. 아이는 아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도’ 라는 족쇄가 이들 가족을 더욱 얽어매고 10년 동안이나 꺼내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10년만에 꺼내 보는 앨범들을 만지던 손은 아들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사진, 아빠의 사진 조차 보여 줄 수 없어 까맣게 타버린 그녀의 가슴처럼 어느덧 검게 물들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