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성의 극치, 그러나 보면 행복한 영화
'윔블던'(2004)은 '뻔함'의 영화다. 해외개봉 시 '예측가능함의 극치'라는 비판에 직면한데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눈감고도 100% 그 전개를 짚어낼 수 있을 정도로 상투적인 줄거리를 과시한다.
더욱이 '스포츠를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배경 때문에, 이 뻔함의 강도는 곱절로 확대된다. 즉 '스포츠 영화의 공식'과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이 상호화합 하는 것.
변주 또는 공식의 줄타기 '윔블던'
하지만 이렇게 상투적인 요소로 범벅이 되어있음에도 불구, '윔블던'을 보면 정말 행복하다는 감정이 샘솟는다. '공식이 추구하는 해피엔딩'이 몇 곱절의 위력을 발휘하는 탓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워킹 타이틀 코미디'가 선사하는 등장인물의 사랑스러움 때문이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를 제외한 워킹 타이틀사 제작 영화 거의가 그러하듯, '윔블던' 또한 별 볼일 없는 영국남성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폴 베타니가 연기하는 피터 콜트는 수년 전 '세계랭킹 11위'의 과거말고는 내세울 게 전혀 없는 하위권 테니스 선수.
더욱이 나이가 들어 은퇴를 눈앞에 둔 불쌍한 처지에 놓여있다. 가족과 주변인물들의 홀대를 무릅쓰고 오로지 참여하는데 의의를 두고 강행한 윔블던 대회에서, 그는 뜻하지 않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이한다.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 리지 브래드버리(커스틴 던스트)와 사랑에 빠진 것.
평범하기 짝이 없는 영국남자가 우아하고 고귀한 미국여자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설정은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1994)에서 출발, '노팅힐'(1999)에서 정점을 이룬 그 공식 그대로다('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는 이 패턴이 상당부분 변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상투성과 답습의 극치를 이룸에도 불구하고, '윔블던'은 제법 신선하다. 일차적으로는 오랫동안 워킹 타이틀 무비의 간판스타 노릇을 했던 휴 그랜트 대신 폴 베타니가 등장하기 때문.
폴 베타니는 휴 그랜트가 역할의 귀천에 상관없이 발산했던 핸섬하고 젠틀한 면모와는 꽤 거리가 먼, '평범함' 그 자체의 배우다. 물론 평범함으로 따진다면 '브리짓 존스 일기'의 콜린 퍼스도 있다. 하지만 보다 소박하고 예민하다는 점에서 폴 베타니는 콜린 퍼스의 투박스러움과는 거리가 있다.
폴 베타니의 평범한 분위기는 커스틴 던스트가 지닌 개성과 더없이 편안한 일치를 이룬다. 그녀가 연기하는 리지는 명백히 '노팅힐'을 참고한, '안나 스콧의 스포츠 버전'이라는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커스틴 던스트가 표현하는 캐릭터 구축은 줄리아 로버츠와 차원이 다르다. 즉 스타이기는 하되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평범한 여성의 면모를 강하게 보여주는 것.
남성의 수직상승·여성의 급전직하라는 독특한 쌍곡선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윔블던'에 변주가 발생한다. 리지가 선사하는 사랑의 마력에 흠뻑 취한 피터가 대회에서 연전연승하며 결승까지 진출하는 것. 이러한 '남자의 신분상승'은 워킹 타이틀 무비로서는 이례적이다. 더욱이 남성의 수직상승은 여성의 급전직하(리지는 결승에 이르지 못하고 중도 탈락한다)를 초래한다는 독특한 쌍곡선을 그린다.
하지만 결과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행복한 엔딩. 피터는 결국 윔블던에서 우승하고 영예로운 은퇴를 하고, 리지는 비록 탈락했지만 이후 세계대회에서 두 번 우승한다. 그리고 둘은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물론 영국에서 말이다).
평범한 인생, 보다 정확히는 영국적인 삶의 미학을 찬양하는 워킹 타이틀 무비 특유의 주제의식은 '윔블던'에서도 변함 없이 반복되지만, 여기에 커스틴 던스트의 존재감이 매우 자연스럽게 융화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여전히 남자주인공의 시선과 의식을 지배하는 '객체'로서의 여성이라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지만, 그동안 강력한 포인트로 자리잡았던 신비함 대신 친근함의 기운이 점차 강도를 더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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