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놈들은 무엇 하는 놈들이기에 고려 국경을 넘어서는 게냐!”
“네 놈들은 무엇 하는 놈들이기에 고려 국경을 넘어서는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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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숨겨진 인물 ‘英雄 김취려’(1)

“고려가 몽골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기로 한 사실 말입니다. 고려 조정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기에 이렇게 대군을 이끌고 정벌하고자 왔습니다.”

영웅, 고려시대 문과 무를 겸비한 인물로 구국의 명분하에 기꺼이 자신을 불사른 김취려 장군을 지칭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취려 장군은 우리 민족의 성웅으로 추앙받는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다. 아니 내막을 살펴보면 오히려 그를 능가한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조선과 고려라는 시대적 상황과 이순신 장군이 우리 민족이 영원한 숙적으로 간주하는 일본을 상대로 승리를 일구어 낸데 반해, 김취려 장군은 북방의 거란을 상대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전투에 임해서는 항상 선봉에 서서 기발한 전술과 계교로 적을 격퇴시킨 지장이었고, 모든 공은 수하 장졸들에게 돌리며 제 몸 이상으로 부하들을 고루 사랑한 덕장이었으며, 심지어 함께 참여한 전투에서 나이 어린 큰아들을 잃고 아군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쓰라린 상황 속에서도 오로지 구국이란 대의 앞에 스스로를 통제했던 올곧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무인정권 시절 권력을 좇는 부나방들과는 달리 오직 국가와 백성을 위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전쟁터를 누볐던 애민정신과 전신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수하 장졸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전쟁터에서 죽어야 한다는, 어명으로도 꺾기 힘들었던 그의 절의와 숭고한 무사정신.
이는 유난히 전쟁의 소용돌이가 심했던 이 나라에서 결코 찾아보기 힘든, 우리 역사와 길이 함께 해야 할 중요한 자산이다. <시사신문>은 성웅 이순신에 비견되는 김취려 장군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영웅 김치려’(도서출판 멍석/070-4122-7573)를 장기간에 걸쳐 연재한다.


영웅의 꿈

“상장군!”
“그래, 어찌 되었는가?”
취려가 피와 살점이 뒤엉겨 붙은 부월을 손으로 닦아내고 있는 중에 문비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거란 군사들이 국경을 넘어 계속 북으로 도망가고 있습니다.”
“한 놈도 빠짐없이 국경을 넘어섰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상장군.”
다음 말은 주지 않고 여전히 부월에 달라붙은 거란 병사들의 살점과 피를 닦아내자 문비가 바짝 다가섰다.
“어찌할까요, 군사를 돌릴까요?”
“그럴 수는 없지!”
짧게 답한 취려가 닦던 행위를 멈추고 부월을 치켜들었다.
“끝까지 쫓아가도록 해야지.”
“상장군, 그렇다고 국경을 넘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곁에 있던 기존정이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며 앞으로 나섰다.
“무슨 소린가. 국경을 새로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나중에 조정에서 국경을 넘어선 죄를 물으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어찌하긴, 그 썩은 놈들을 새롭게 정한 국경 근처에 이주시켜 살게 하면 그만이지.”
말을 마치고는 급하게 말, 햇빛에 더욱 반짝이는 흑마에 올라탔다.
“아버지!”
막 말에 박차를 가하려는데 큰 아들 단병이 다가왔다.
“왜 그러느냐?”“뒤를 돌아보시지요.”
순간 고개를 돌리자 수만의 병사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고 있는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저 놈들은 또 뭐란 말이냐!”
“아직은......”“그래? 그럼 내가 직접 알아볼 터이니 자네들은 빨리 거란병사들의 뒤를 쫓도록 하게.”“혼자 가시게요?”“내 혼자 갈 터이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거란을 끝까지 추적해서 고려의 영토를 넓히도록 하라 이 말이다!”
완고한 말투에 아들 단병을 위시한 모든 장수들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에 올라 급히 거란 군사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취려가 말에 박차를 가하고 국경을 넘어서는 군사들에게 달려갔다.
“네 놈들은 무엇 하는 놈들이기에 고려 국경을 넘어서는 게냐!”부월을 들고 눈을 부라리는 취려의 일갈에 다가서던 군사들이 일시에 멈추어 섰다.
“네 놈들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겠느냐!”
다시 고함을 질러대자 상대방에서 한 장수가 말을 타고 달려 나오고 있었다.
“형님, 저 합진입니다.”
“자네가 어인 일인가!”
오랜만에 만나는 합진이 반갑지 않을 수 없었으나 몽골군의 장수로서 대군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서는 그에게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형님은 약속을 잊었습니까?”“무슨 약속 말이더냐?”
“고려가 몽골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기로 한 사실 말입니다.”
“그건 내 알바 아니네. 그런데 대군을 이끌고 어쩐 일로 고려 국경을 넘어선다는 말이더냐!”
“고려 조정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기에 이렇게 대군을 이끌고 정벌하고자 왔습니다.”
“뭐라, 그런 사유로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순간 미간을 찌푸리며 부월을 치켜들자 합진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형님은 정녕 우리 사이의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우리 사이의 약속이라니, 네가 나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한 사실 말이더냐?”
“몽골과 고려가 형제의 맹을 맺은 일 말입니다.”
끙 하는 소리를 내뱉고는 합진의 뒤를 따르는 군사들을 주시했다.
“그런데 네 놈들은 제 형제를 죽이지 못해 이리도 안달하느냐!”
순간 합진의 눈에서 살기가 일어났다.
“형님,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길을 여시오!”“뭐라, 네 놈이 지금 어서 죽여 달라 재촉하는 게냐!”
눈을 부라리며 노기를 드러내자 합진이 히죽히죽 웃었다.
“뒤를 돌아보시고 말하심이 어떠하겠소!”
“뒤를 돌아보아 무엇 한다는 말이냐. 그저 네놈들만 주륙내면 될 터인데.”
“정녕 혼자서 우리 몽골 대군을 상대하시겠다는 말이요?”
합진과 몽골 병사들을 쏘아보다가 부월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 놈들 상대 하는데 이 부월도 필요치 않지.”
아직도 피와 살점이 달라붙은 부월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다가는 옆으로 던지고 칼을 뽑아 들었다.
“형님이 정녕 이 아우 손에 죽겠다 이거요!”
“이 놈아, 어찌 고려가 너희 놈 같은 오랑캐 말발굽에 짓밟힐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침과 동시에 박차를 가하여 순식간에 합진 앞에 다가서자 합진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해갔다.
“네 이놈, 다시 한 번 혀를 놀려봐라!”
말과 동시에 칼을 치켜들고 막 내리치는 순간 오른 쪽 팔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어느새 날아왔는지 화살이 취려의 오른 팔을 관통했다. 멀거니 그를 바라보다 왼 손으로 칼을 잡아들고 다시 합진에게 내리 치는 순간 왼팔에서 통증이 밀려오고 손에 들려 있는 칼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양팔을 관통한 화살을 부러뜨려 화살촉이 있는 부분을 잡고 합진에게 돌진했다. 막 합진에게 도달하는 찰라 양 다리 그리고 온몸에 화살이 박히고 있었다. 물끄러미 자신의 몸을 바라보자 화살이 박힌 곳에서 새까만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네, 이놈!”
일갈을 터뜨리고 온몸에 힘을 주고 달려가는 순간 몸이 기우뚱거리며 이내 고목이 쓰러지듯 스르르 옆으로 넘어졌다. 그 상태에서 땅바닥에서 넘어진 사유를 생각한다는 듯이 눈을 멀뚱거려 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마음뿐이었다. 또한 언제 다가왔는지 합진이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이래도 항복하지 않겠소!”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과 합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싸늘한 미소를 보냈다.
“이 놈아, 이 김취려에게 항복이 어이 가당한 말이더냐!”
“그렇다면 원대로 해드려야지.”
“흐흐, 이놈아. 마음대로 하거라.”
“마지막으로 할 말 없소.”
“비록 내가 이리 죽는다만 저승에서라도 몽골 오랑캐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고 말테다, 이놈아!”
“편한 대로 하시구려.”
“뭐라, 내 이놈을. 이 놈!”
있는 힘을 다해 일갈하자 합진이 다시 히죽히죽 웃으며 칼을 내리쳤다. 순간 칼날이 햇빛에 반짝였다.
“아버지!”
외마디 소리에 눈을 떴다. 방안이 어두침침했다.
“정신이 드세요!”
아들(金佺)과 아내가 양쪽에서 손을 잡고 근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살피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썼으나 마음뿐이었다.
“여보, 기운을 내시고 말씀해보세요!”
아내의 소리에 힘들게 입을 열어 온 힘을 집중해서 말을 하려는 순간 목구멍에서 가래가 끓어오르며 말문을 막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이전한 지 근 이 년여가 흘렀다. 어떻게든 백성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리라 다짐을 하고 부월을 잡아보았으나 마음뿐이었다. 적지 않은 기간 전쟁터를 누비며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운신조차 힘들었고 그예 피눈물을 머금고 강화도에 찾아들어 생의 마지막을 달리고 있었다.
“아버지, 힘을 내세요. 이렇게 끝내실 수는 없잖아요!”아들의 간절한 말에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당당하던 기백은 다 어디로 가고 이렇게......”
아내의 말에 이번에는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취려의 몸을 쓰다듬었다. 아들의 손이 스쳐 지나가는 온 몸, 전쟁터를 누비며 다니다 부상당한 상처에서 마치 미세한 통증이 밀려오는 듯했다.
순간 그 통증을 보듬겠다는 듯이 아내가 상반신을 기울였고, 아내가 흘리는 눈물이 가슴으로 떨어졌다.
“여보,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요. 그러니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자신의 상태가 아내에게 전달되었는지 아내의 목소리에 가래가 함께 하는 듯했다.
“그래요, 아버지. 어서 일어나세요.”
아들 역시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자신은 어떻게든 말을 하려고 또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하고 싶은데 마음뿐 전혀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눈을 끔벅거려 보려 했으나 그도 여의치 않았다.
다시 한 번 눈을 끔벅거려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자 마치 몸이 알 수 없는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일어났다.
“이보시오, 장군. 장군답게 힘을 내세요.”
아내가 기어코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버지! 단 한마디라도, 단 한마디라도......”
“그래요, 여보, 단 한마디라도 해주세요.”
‘여보, 그동안 고생 많으셨소. 나라를 구한다고 가족을 소홀히 한 내가 무슨 염치로 당신에게 말을 하겠소. 그저 내 먼저 가서 큰 아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남은 인생 즐기며 천천히 오시구려. 그리고 전아, 아니 아들아. 이 아비가 네게 짐만 떠넘기고 가는구나. 부디 이 아비 대신 어머니 그리고 가족들을 잘 돌보아다오.’
마치 그 말이 전달이라도 된 듯 아내가 상반신을 압박해왔고 아들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어렴풋이 그를 느끼며 다시 말을 시도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이번에도 말을 할 수 없었다. 피인지 가래인지 모를 이물질이 목구멍을 가득 메웠고 자꾸 눈이 감겼다.
“아버지, 안 돼요!”
“여보, 안 돼!”
아내와 아들이 애타게 부르짖는 소리가 귓전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작가 황천우 프로필

- 1959년 서울 출생
- 대광고, 서울시립대 영문학과 졸업
주요작품
- 단편 : 해빙, 파괴의 역설
- 장편 : 정희왕후, 묘청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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