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많은 송아지들이 죽어 갔을까?
얼마나 많은 송아지들이 죽어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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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터에서-‘선물 받은 지갑’

남편한테 지갑 하나를 선물 받았다.
지금까지 가져본 것 중에 제일 고급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모처럼만에 남편에게
받은 선물이고 보니 마냥 기분이 좋다.
그래서 몇 번이고 열었다 닫았다 살펴보고 만져보고..................
얼마 남지 않은 자정을 향해 쉬지 않고 돌고 있는 시계바늘을 보며 한손으론 지갑
을 만지작만지작, 한손으론 끄적끄적 펜을 굴린다.
남편과 아이는 똑같은 큰 대자 폼으로 꿈도 같은 꿈을 꾸는 듯 싶다.
참으로 편안해 보이는 단꿈을 꾸는 모양이다.
나만의 시간을 내 작은 방안에 가두어버린 고요의 세상,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을 붙
들고 무엇인가를 남기기 위한 끄적끄적...... 볼펜 굴리는 소리, 파괴신의 왕림이다.
하지만 촛불하나가 밝힌 이 사색의 공간이 나에게는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파라다이
스다.
그런데 만지작거리다 우연히 확인한 “송아지 가죽”이란 라벨에 무의식에 세계에 가
둬놓았던 나의 어린 날의 친구였던 송아지 모습이 돋는 소름보다도 더 빠르게 떠오
른다.
인간의 오만함과 잔인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서 조심스레 문질러본다.
꿈길을 걷고 있을 아이의 보드라운 살결을 그리고 그 여린 송아지의 살갗으로 만들
어졌을 지갑을............
얼마나 많은 송아지들이 죽어 갔을까?
도살장으로 끌려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어린 송아지, 가죽을 벗기는 인간들, 그런
가죽으로 이런 상품을 만드는 사람들, 그리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상품을 구입하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는 욕구충족을 위해 신이 그렇게 사랑했었던 순수를 예전에 팔
아먹어 치워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내 어릴 적 우리 집은 근육이 우락부락한 집체만한 누런 황소들이 있었다.
두 사람을 머슴으로 두었을 정도로 많은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칠남매
의 학자금과 엄마, 아빠, 그리고 머슴들까지 열한 식구의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었
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키우던 황소가 새끼를 낳는다는 것은 집안의 중대사였다.
잘 키우면 재산과 농사일에 귀한일손을 한꺼번에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왔다갔다 막걸리 잔을 단숨에 비우며 노심초사, 그런 어른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기
라도 한듯 두 다리가 “쑥” 나오는가 싶더니 비틀비틀 온 마당을 헤매는 송아지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와~”하는 반가움과 놀라움 그리고
신비감에 도취된 박수를 치곤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어미 소가 그런 새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왕방울
눈을 끄먹끄먹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산고에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가방이나 지갑이 되고 식탁에 고기가 되는 미래를 한
탄했던 것일까?
어째든 송아지가 태어날 때마다 집안에 막내인 나는 언니나 오빠보다 송아지하고
보내는 시간이 많았었다.
언니나 오빠는 방과 후면 책가방은 마루에 던져놓고 농사일이다 집안일이다 해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는 동생을 들쳐 업고 꼴을 먹이러 나가는 것
으로 그 대열에 동참하곤 했었다.
그럴 때면 따라나선 송아지를 행여 다칠세라 조심스레 어미 소의 고삐 속에 끼고
이는 사, 이삼은 육, 이사 팔.............칭얼대는 동생을 달래기 위해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무엇보다 먼저 외양간으로 달려가 잠에서 덜 깬 눈을 비
비며 어미 젓을 빨고 있는 어린 송아지와 인사를 나누곤 했었다.
“잘 잤나. 와 어제 꿈속에는 안 왔노? 많이 기다렸다 아니가.”
엄마 젓을 물고 있는 아기 소는 곁눈질 왕방울 눈을 끄먹끄먹, 어미 소는 밥 먹는
데 방해하지 말라는 듯 음매~음매~ 채찍 같은 꼬리를 좌우로 찰싹찰싹,
그런데 나는 오늘 송아지 가죽 지갑을 남편에게 선물 받았다.
선물 받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연예 했을 때, 결혼하자고 생 때를 부릴 때, 딸아이 낳았을 땐 펑펑 울었다.
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들을 기대하다 지쳐버린 시간들, 이것이 보상인가 싶다.
하지만 어린 시절 둘도 없는 친구였던 송아지,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 간다는 설래
임에 앞서가는 아버지를 한달음에 따라나선 까무잡잡한 땅딸보 여고생을 음매~ 음
매~마을 밖까지 애타게 부르던 송아지,
“아부지예. 송아지 팔지마이소.”
“..................”
그래서 그런지 지갑의 질감이 왠지 기분 나쁜 감각으로 미끈거린다.
번들거리는 피혁용 왁스 탓인지 심한 기름기가 지갑을 만지고 싶지 않게 한다.
상표가 새겨진 딱딱한 호크 단추의 쇠붙이는 송아지 발톱을 만지는 느낌이어서 소
름이 돋는다.
여덟 개의 카드를 넣을 수 있게 만들어 진 내부는 기분 나쁘게 뻣뻣하다.
테두리에 부착된 금속 갈고리단추는 딱딱하고 뾰족한 소뿔 같아 미안하다.
하지만 촉감은 메니큐어 칠한 손톱마냥 매끄럽고 실크 이불처럼 부드러운 건 부정
할 수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어린 날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어미 소 옆에 평화롭게 누워있던 새끼
송아지를 어루만졌을 때의 보드라운 감촉은 아니다.
무언의 고뇌와 희망, 사랑과 평화, 기쁨과 슬픔으로 작품노트를 채워보겠다는데 마
음만큼 신통한 발상은 떠오르질 않는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본다.
어릴 적 나와 놀아줬던 자꾸만 도망가는 바람에 오래 안아 줄 수 없었던 나의 친구
야! 미안하다.
그해 여름 방학 때 집에 돌아가 보니 염려했던 대로 니가 없더구나.
하지만 나는 너를 찾기보다 “세상사 다 그런 거지 뭐” 하면서 수긍해버렸어.
상품으로 거듭난 친구의 유전자를 보며 슬퍼하는 막내딸이여!
잊고 있었던 순수를 슬퍼하는 중년의 아줌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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