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내부에서 ‘보수대연합론’ ‘분권형 개헌론’이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보수대연합론’의 원조는 지난 1990년 3당 합당에서부터 출발한다.
반면 이번 ‘보수대연합론’은 지난 지방선거 직후부터 시작됐다.
지방선거가 한나라당 참패, 민주당 승리로 나타나자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가 이를 처음 언급한 것이다.
그 뒤 이에 대해 화답이라도 하듯 친이 직계로 불리는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이 공개적으로 ‘군불’을 지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에는 신임 안상수 대표가 이를 추진할 의사를 내비쳐 그 배경에 무게가 쏠리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보수대연합론’은 지난 90년 당시 3당이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합당하여 성사된 바 있지만 나중에 내각제 개헌이 무산되면서 사실상 실패로 끝난 적이 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여권의 ‘보수대연합론’과 지난 90년대 당시의 ‘보수대연합론’과는 어떤 비슷한 점과 차이점이 있을까.
‘보수대연합론’ 원조
사실 ‘보수대연합론’이 정치권에서 처음 대두된 것은 지난 1990년 정초였다.
당시 정치는 ‘1노 3김’ 시대였다.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통령,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이끄는 4당이 팽팽히 대립하면서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민정당은 집권당이었지만 국회에서는 늘 과반수가 넘지 못해 소수당에 불과했다.
평민당, 민주당, 공화당 야3당이 뭉치면 국회 과반수를 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의 정국을 처음으로 ‘여소야대’ 시절이라고 불렀었다.
하지만 이 보다 민정당의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92년 직선제로 치러지는 대선이 불과 2년 앞으로 다가왔지만 야당을 이길 수 있는 대권 주자가 뚜렷히 나타나지 않았었다.
야당에는 김대중, 김영삼 이라는 부동의 대권 주자가 건재해 있는 반면 집권당 민정당 주자들은 초라하기만 했다.
때문에 민정당 내부에서 다른 당과의 합당을 통해 ‘여소야대’를 ‘여대야소’로 만들고 내면적으로 ‘내각제’ 개헌을 통해 92년에 다시 정권을 창출키로 의견을 모았다.
결국 이에 적극 호응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이 이끄는 민정당과 전격 합당을 감행해 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그때 표면적 합당의 대의명분은 ‘보수대연합론’ 이었다.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은 국회에서 개헌선인 2/3를 넘는 218석을 확보했다.
지역에 기반한 4당 구조를 ‘보수 대 진보’의 양당구조로 바꾸어 놓았다.
민자당은 민주·번영·통일을 이념으로 내걸었으며, 총재 1인과 대표위원 3인의 집단지도체제로 이끌어 갔다.
하지만 계파간의 이해관계에 따른 공천 및 당직배분으로 당내갈등이 지속되면서 92년 제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총 299석 중 149석을 얻는 데 그쳐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특히 이보다 앞서 민자당은 출발 직후부터 각 계파간의 치열한 대립으로 얼룩졌다.
원인은 차기 대선을 놓고 합당의 전제조건으로 이면에 합의했던 내각제 개헌 약속을 당시 민자당 김영삼 대표가 파기함으로써 시작됐다.
정가 한 관계자는 “인위적인 정계개편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과 내면적으로 합당의 최대 조건이었던 내각제가 개헌 추진이 무산됨으로써 ‘보수대연합론’에 기인한 민자당은 사실상 실패한 정당”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90·2010년 ‘보수대연합론’ 비교
이같은 지난 정치사를 돌이켜본 ‘보수대연합론’이 다시 2010년 판으로 정가 중심에 돌아올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90년도 ‘보수대연합론’과 지금의 ‘보수대연합론’과는 어떤 면에서 비슷한 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우선 비슷한 점은 이렇게 압축된다.
표면적으로 보수와 진보로 정계개편을 통해 확실한 양당 구도로 만든다는 점이다.
정가 한 분석가는 “당시 평민당을 진보 쪽으로 보고 여기에 반대편 모두를 보수 쪽으로 묶어 정계개편이 이루어졌다”면서 “사실상 평민당 대 반평민당 구도로 성사시킨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번 ‘보수대연합론’은 민주당 민노당 창조한국당을 진보로 보고 나머지 한나라당 선진당 국민중심연합을 보수로 보아 이분법 구도로 만든다면 지난 90년대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다른 인사는 90년 ‘보수대연합론’과 2010년판 ‘보수대연합론’이 결정적으로 비슷한 점은 지난 3당 합당의 고리가 ‘내각제’였다는 점에서 이번과 거의 유사하다는 것.
그는 “이번에 ‘보수대연합론’이 실현된다면 그 다음에는 ‘분권형 개헌’”이라면서 “‘분권형 개헌’도 사실은 내각제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지난 90년의 ‘보수대연합론’과 일맥상통한다”고 진단하고 있다.
특히 지난 3당 합당이 92년 봄 총선과 그해 겨울 대선을 가늠하고 이뤄진 것이고, 이번에 ‘보수대연합’이 성사된다면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매우 흡사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여기에 대해 정가 한 관계자는 “지금의 헌법으로 보면 총선과 대선은 20년 주기로 같은 해에 치러지게 되어 있는데, 지난 92년과 2012년이 거기에 해당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보수연합론’이 나왔던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배경은 매우 다르다는 주장도 많다.
일각에선 이에 대해 90년 당시 집권당 민자당에서는 야권 후보에 대항할 마땅한 주자가 없는데 반해 지금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 전 대표가 차기 주자급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에는 야권에서 확실한 대선 주자가 있었지만 현재 야권 주자들을 그때에 비교하면 매우 초라한 분위기이다.
정가 주변에선 “90년 집권당에서 거론되던 차기 주자들의 면면을 보면 당시 야권의 두 김씨에 비해 너무 약체였다”면서 “하지만 지금 여권의 박근혜 전 대표를 야권의 주자들과 비교하면 당시와는 완전 반대의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
90년대와 2010년대 다른 점은 또 있다.
이는 당시 3당 합당 명분이 겉으로는 ‘보수대연합론’이었지만 내면적 연결고리는 ‘내각제’였다는 것이 이번에도 유사지만, 결정적으로 이를 당시에는 공개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보수연합’을 추진할 경우 이를 공개하고 성사시킬 분위기라는 것.
정가 한 관계자는 “지난 90년 3당 합당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내각제를 공개하지 않아 나중에 이를 알게 된 국민들의 분노와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면서 “이같은 학습효과를 갖고 있는 여권이 이번에 ‘분권형 개헌’을 매개로 ‘보수대연합론’을 추진할 경우 이를 공개하는 것은 필수”라고 예상하고 있다.
결국 90년 ‘보수대연합론’을 명분으로 3당 합당이 성사는 됐지만 ‘내각제’ 파동에 걸려 결과적으로 실패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는 지적에서 이번 2010년판 ‘보수대연합’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방식으로 추진되어,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