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3세 엇갈린 운영, 이재용 vs 이재찬
재벌 3세 엇갈린 운영, 이재용 vs 이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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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家의 비극, 이윤형에 이어 이재찬 자살

삼성가의 비운인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셋째 딸 고 이윤형씨가 지난 2005년 자살한데 이어 이건희 회장의 조카이자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의 손자인 이재찬(46)씨가 숨진채 발견됐다.


이재찬 씨는 운명이 바뀌었다면 삼성그룹을 거머쥘 수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아버지인 고 이창희 회장의 몰락으로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물려받음으로써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과 희비가 엇갈렸다.
<시사신문>은 투신자살로 추정되는 이재찬 씨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또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조명해 봤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손자인 이재찬 씨는 지난 18일 오전 7시20분경 서울 용산구 이촌동 D아파트 1층 현관 앞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재찬 씨를 처음 발견한 경비원 신모 씨는 경찰조사에서 “현관 앞 주차장 주변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가보니 흰색 면티를 입은 남자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고 진술했다.


숨진 이재찬 씨는 이건희 회장의 차남인 고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의 아들이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조카다.


경찰은 경비원 등의 진술로 미뤄 이재찬 씨가 투신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정확한 사망 경위를 조사 중이다. 경찰은 현재 이재찬 씨의 유서를 남겼는지 여부와 왜 투신했는지를 조사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이재찬 씨의 아파트에 외부침입 흔적이 없고 문도 잠겨 있었다고 한다.


또 시신에 타살 흔적이 없는 점 등으로 미뤄 투신자살 한 것으로 경찰은 결론을 내렸다. 유가족 측도 부검을 원치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사망 소식에 지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 지인은 “사업 상황이 어려웠으나 알려진 것과 달리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았다. 우울증 등을 겪지도 않았다”며 “평소 철두철미한 스타일이었던 만큼 스트레스가 많지 않았겠느냐”고 자살 배경을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이재찬 씨는 사고 직전까지 이 아파트 5층에서 혼자 머물며 생활했다고 한다. 특히 최근 5년간 가족과 떨어져 이곳에서 월세로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1991년 초 이재찬 씨의 부친인 고 이창희 회장이 혈액암 판정을 받고 불과 4개월여 만에 숨진 것과 2000년 새한그룹이 채권단에 경영권 포기각서를 쓴 이후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 이재찬 씨의 자살 동기가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또한 이재찬 씨가 삼성가를 찾아가 자금난을 호소하며 사업을 의논했다고 삼성 고위임원이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밝혀, 이재찬 씨가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금난의 어려움에 봉착한 나머지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미디어업계의 선구자

이재찬 씨는 이창희 회장의 4남1녀 중 차남으로 1983년 경복고와 1989년 미국 디트로이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새한미디어 부사장을 거쳐 1997년 새한미디어 사장 및 새한그룹 생활서비스부문장을 지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룹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최원석 전 동아건설 회장의 딸 선희 씨와 결혼해 아들 2명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5년 전부터 따로 떨어져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 따르면 이재찬 씨가 새한을 떠난 후 경기도 등에서 개인사업을 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어떤 사업에 종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재찬 씨는 살아 생전에 음반영상제작업체인 디지털미디어에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국내 최초의 기업형 연예매니저먼트로 평가받고 있는 디지털미디어는 1990년대 자회사인 스타서치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스타서치에는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김혜수, 염정아, 유인촌, 황신혜 등 23명의 연기자가 소속돼 있었다. 이재찬 씨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를 미디어업계의 선구자라고 평가한다.


1997년대 독립프로덕션으로는 최초로 일본 위성방송업체와 공동으로 방송프로그램을 공동제작하기로 조인식을 하는가 하면, 세계적인 미디어재벌인 루퍼트 머독을 한국에 초청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당시로는 앞서가는 마케팅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고 지인들은 전하고 있다.


이재찬 씨의 투신자살로 인해 ‘새한그룹의 비운의 역사’에 대해서도 세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창희 회장은 삼성가에서 비운의 황태자로 불렸다. 그러나 이창희 회장은 1991년 58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고 전 삼성가의 방계그룹이었던 새한그룹을 설립한 이창희 회장은 삼성에서 독립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지만 결국 젊은 나이에 사망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새한은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된 제일합성을 넘겨받아 기존의 새한미디어와 함께 그룹체제를 갖추고 이창희 회장의 부인인 이영자 씨가 회장을, 장남인 이재관 씨가 부회장을 맡았다.


그룹명을 정하고 공격적인 경영에 나선 새한그룹은 IMF위기에서도 대대적으로 사업을 확장, 자산규모 재계 27위까지 올랐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은 결국 큰 화를 불러왔고 주력사업의 경기침체로 경영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결국 2000년 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2003년에는 이창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관 새한미디어 부회장이 분석회계 및 불법대출 등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후 새한미디어는 이창희 회장의 부인 이영자 씨가 운영하다 경영에서 손을 뗀 후 현재 매각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로써 새한그룹은 삼성에서 독립한 그룹 중 유일하게 '몰락한 기업'이라는 오명을 안게 된다.


한편, 이 같은 재벌가의 비극은 삼성가에서만 그친 게 아니다. 현대가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대북송금과 비자금 150억원 조성 의혹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아오던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지난 2003년 서울 계동 현대사옥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 정몽헌 회장의 사무실에서는 '대북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됐다. 2000년 3월 이른바 '왕자의 난'을 통해 공식적으로 현대그룹의 법통을 이어받은 정 회장의 경우 의욕적으로 추진한 대북 사업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와 검찰의 잇따른 소환 조사에 중압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지난 2009년 고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도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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