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독립운동가 심남일 선생
11월의 독립운동가 심남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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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의병 조직해 호남 일대서 항일투쟁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선정한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심남일 선생이 올랐다.

심 선생은 1908년 의병을 조직해 호남 각지에서 일본군에 타격을 가하고, 다음해 일본군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체포돼 사형 순국했다.

선생은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신기에서 심의봉과 진주 강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관직을 역임한 적은 없지만 서당 훈장을 지냈고, 손수 농사를 지으며 부인과 2남 3녀를 뒀다.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됐고, 호남 일대에 일제의 경제 수탈이 극심해지자 선생은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명망이 높은 유학자도, 재력 있는 부호도 아닌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선생은 1907년 후반 전남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해 기삼연 의병장 휘하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08년 2월 의병장 기삼연이 체포, 총살되고 김율, 김태원 등 수뇌부를 비롯한 다수의 의병이 전사해 의진이 와해되자 선생은 의병을 다시 모아 독자적 의병부대를 결성했다. 선생은 선봉-중군-후군의 전통적인 삼군체제를 확립하고, 의병들이 지켜야 할 10개 조항을 고시해 재물의 강탈을 금지시키는 등 의병진의 기강을 세워 민심의 지지 속에 대일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심 선생의 부대는 1908년 음력 3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능주 석정,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을 비롯해 1909년 음력 7월 장흥 봉무동 전투까지 일본 군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전남 중남부 지역 대표적 의병부대로 성장했다.

의진은 일본의 국권강탈과 경제적 침탈, 단발 강요, 일본인 관리 임명, 군대해산, 황제양위 등에 강력히 반발하고, 친일세력과 일본세력 축출을 내걸고 활동해 나갔다.

선생은 기세를 몰아 의진 간의 연합을 주장하고 전남의 동부 안규홍 의진, 서부 전해산 의진 등 여러 의진과 두로 접촉해 호남동의단을 결성하고 연합투쟁을 전개했다. 일제는 1908년 후반부터 선생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됐다.

그들은 선생을 비롯한 호남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작전을 모색하고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전개했다. 1909년 8월부터 2개월간 일제는 살육, 방화, 약탈, 폭행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해 수많은 의병장과 의병을 피살, 체포했다.

1909년 10월 9일 선생은 부대장 강무경과 함께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잠복해 있다가 체포됐고, 1910년 10월 4일 대구 감옥에서 사형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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