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경란 상임위원과 유남영 상임위원 동반 사퇴의 직접적인 배경은 지난달 25일 전원위원회에 상정된 ‘인권위 운영규칙 개정안’이다. 사퇴한 두 상임위원들은 상임위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개정안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해왔다.
현 위원장 “흔들림 없이 업무 추진할 것”
논란의 시발점이 된 ‘인권위 운영규칙 개정안’은 상임위원 3명이 안건에 합의를 해도 위원장의 판단으로 전원위에 회부할 수 있다. 또 상임위의 의결로만 가능했던 긴급 인권 현안에 대한 의견 표명 및 권고도 전원위에 이관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사퇴한 두 상임위원은 “위원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위해서 설치된 상임위원회의 존재 자체가 무력화될 것”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인권위는 위원장과 3명의 상임위원, 7명의 비상임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 중 진보인사와 보수인사가 각각 5명씩이다. 현 위원장을 포함하면 진보와 보수의 비율은 6대 5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현 위원장이 규정까지 바꾼 것은 이미 독단을 넘어섰다는 게 인권위 안팎의 설명이다.
게다가 현 위원장의 말처럼 현 정부의 입맛에 맞는 상임위원이 선정될 경우 인권위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본래 인권위는 국가권력의 오남용이나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로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것이 설립취지다. 국가권력을 감시하는 기능을 하는 만큼 현 정부에 대해 쓴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 위원장의 취임 이후부턴 정권을 불편하게 하는 사안에 대해선 전혀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논란이다. 그나마 사퇴한 2명의 상임위원이 인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는 게 인권위 안팎의 설명이다. 따라서 이 2명의 후임을 선정을 두고 인권위 안팎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을 수밖에 없다.
사실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의 취임 이후부터 잡음이 많긴 했지만 지난달 25일 상정된 운영규칙 개정안이 결정적 화근이 됐다. 인권위는 개인이 아닌 합의체 운영체제이나 현 위원장이 운영규칙 개정안을 통해 상임위 결의 없이 위원장 단독으로 전원위원회에 상정할 수 있도록 하게 한 것이다. 이 같은 결정으로 유남영ㆍ문경란 상임위원은 동반사퇴를 강행했다.
물론 현 위원장은 이에 대해 “임기가 만료되는 두 상임위원이 물러나면 한나라당 출신 위원들이 오게 되는데 독단적으로 결정하려면 규정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며 항간에 제기되고 있는 의혹들을 일축했다.
하지만 논란은 계속됐다. 현 위원장에 대한 사퇴 압박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지난 16일 현 위원장은 첫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그는 “앞으로도 위원회 업무를 수행하면서 오로지 인권이라는 기준을 토대로 흔들림 없이 업무를 추진하겠다”며 “국가인권위원장으로서 저에게 부여된 소임을 변함없이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인권위원장직에서 물러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최근 논란과 관련한 국가인권위원장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해명자료에서 현 위원장은 “최근 우리 위원회 인권위원 세 분이 임기 만료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시점에서 사임한 데 대한 논란 등으로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유감을 표하면서도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인권위원들의 사퇴가) 정치 쟁점화되고, (이로 인해 인권위에 대한) 불신감이 확대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불편한 심경을 나타냈다.
“그간 묵묵히 사태의 진정을 기다렸으나 각종 성명, 논평이나 보도가 사실과 너무 다른 양상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현 위원장의 생각이다.
이어서 현 위원장은 “우리 위원회의 독립성이 외부의 일방적 비난으로 인해 흔들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사회적으로 지난한 문제에 대해 의원회에 급박한 결정을 요구하고 수용되지 않는다고 하여 압박하는 모습도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인권위의 결정과 관련된 비판에도 날을 세웠다.
또한 “위원회의 독립성은 정부뿐만 어떠한 외부의 힘으로부터도 독립되어야 중요한 인권문제에 대한 위원회 의사결정이 진지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며 인권위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특히 극심한 논란을 빚은 운영규칙 개정안에 대해서는 “비상임위원 3명이 현행 운영상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전원위원회 안건으로 제출한 것으로, 인권위 운영규칙에 따라 위원장은 안건 제출을 거부할 수 없으며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현병철 위원장 사퇴하라” 반발 거세져
그러나 현 위원장의 이 같은 입장과 달리 전국 223개 인권단체로 구성된 ‘현병철 인권위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인권시민단체 대책회의’는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현병철 위원장이 인권위를 파행적으로 운영하고 독립성을 훼손하게 된 데에는 현 정부의 인권위 흔들기 정책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권과 관련된 경험과 지식이 전혀 없는 무자격자를 임명한 정부의 책임은 매우 크다”며 즉각적인 현 위원장 경질을 촉구했다.
여기에 자진사퇴 할 뜻이 없다는 입장을 밝힌 현 위원장에 대해 인권위 직원들이 지난 17일 직접 비판하고 나섰다. 특히 이들은 전날 현 위원장이 “각종 성명과 논평 언론보도가 사실과 다른 양상으로 가고 있다”며 내놓은 해명 자료에 대해 “현 사태의 실체와 내용을 왜곡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부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조직 수장의 말이 내부에서조차 ‘거짓말’ 지적을 받은 것이다.
인권위 직원들은 이날 내부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인권위 독립성 훼손, 인권 현안에 침묵, 상임위원회 무력화와 합의제 기구를 무시한 독단적 운영 등 5개 쟁점별로 현 위원장의 전날 해명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들은 “취임 이후 표현의 자유 관련 성과가 적지 않다”는 현 위원장의 입장에 대해 “표현의 자유 관련 사건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상임위에서 의결된 것으로, 현 위원장은 적극적으로 의결 의사를 밝혔던 상임위원들과 달리 ‘이거 안 하면 안 되겠냐’고 묻는 등 소극적 태도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인권위가 마땅히 검토해 의견표명을 해야 할 핵심적인 인권 사안들에 대해 현 위원장은 정치적 사안이라는 이유로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처리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며 “오해를 풀겠다던 해명자료가 오히려 직원들에게 더 많은 불신을 안겨줬다”고 비판했다.
인권 관련 경력 전무한 ‘현병철’
현 위원장은 전남 영암 출신으로 중앙고를 나왔고 원광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한양대 법대학장,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위원, 한국비교사법학회 회장, 한양대 행정대학원장 등을 거쳤다. 화려한 이력을 갖고는 있지만 인권과 관련한 경력은 전무하다.
대학 학장 부임 때 가장 먼저 모든 교직원과 개별 면담을 하고 점심을 했을 정도로 조직 안팎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민법을 전공한 법학자로 30여년간 한양대학교 법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주로 재산법과 노동법을 연구했다.
한양대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법대학장, 학생처장, 총무처장, 행정대학원장 등의 보직을 맡아 법학자로서 소신과 원칙에 충실한 업무처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목표가 설정되면 이해관계자뿐만 아니라 부하직원들과도 충분히 의견을 나누는 방법으로 조직의 역량을 결집해 사업추진에 따른 각종 장애요인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능력도 있다.
2001년 국내 최초로 ‘한국법률가대회’ 창립을 주도했으며, 비교사법학회를 창립하고, 학술지 ‘저스티스’ 초대편집위원장 등을 지냈다.
그러나 현 인권위원장은 2009년 7월 인권위원장에 내정 될 당시 인구듣도보도 못한 사람이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많을 정도로, 그는 인권 관련 경력이 전무하다. 법학교수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민법 관련 연구활동을 했지만, 인권과 관련해서는 대외활동은 물론 연구실적도 전무하다.
당시 국가인권위 한 관계자는 “인권위원장 물망에 오른 적도, 인권위 관련 활동을 한 전력도 없다는 점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사”라면서 “전임 안경환 위원장이 시민운동을 활발하게 했고 현 정부의 인권정책을 비판하면서 물러났다는 점에서 정부와 각을 세우지 않을 무난한 인사를 내세운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무색무취한 인물을 위원장으로 세워놓고 실세 사무총장을 통해 국가인권위를 통제할 가능성도 크다”고 분석했다. 또한 그는 “지금도 인권위원 중 법학 전공이 8명인데, 시민사회 경력이 전무한 법학 교수가 위원장으로 올 경우 인권을 법 테두리 안에서 좁게 해석할 여지도 있다”고 비판했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현병철 인권위원장이 인권위 파행·퇴진 여론에도 “흔들림없이 업무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처럼 ‘버티기’가 계속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