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독립운동가 백일규 선생
12월의 독립운동가 백일규 선생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군사양성과 언론활동을 주도한 미주독립운동 지도자

국가보훈처는 12월의 독립운동가로 백일규 선생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백 선생은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미주 샌프란시스코 대동보국회 회장 및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대동공보, 신한민보의 주필로 항일 언론을 선도했으며, 한인소년병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등 미주 독립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

선생은 평안남도 증산군 성도면 오화리에서 부친 백린과 모친 송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한학을 배운 선생은 동학에 깊이 공감하고 ‘접주’로 활동했으나 한계에 부딪치자 미주 유학을 결심하고, 1905년 6월 9일, 진남포를 출발해 일본 고베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했다.

선생은 하와이에 와서 사탕수수 농장의 고된 노동 중에도 ‘에와 친목회’에 가입해 윤병구, 강영소 등과 함께 국권 회복의 방책을 논의했고, 이후 미주 본토인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문양목의 후임으로 대동보국회 중앙회장 겸 대동공보의 주필에 선임돼 일본의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데 앞장섰다.

1908년 미주 한인사회의 반일여론은 같은 해 3월 23일,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으로 극대화됐다.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선전하는 대한 제국 외교고문에 대한 응징이자 일제에 대한 경고였다. 의거 직후 선생은 ‘7인 전권위원회’를 구성해 양 의사의 재판을 후원하고, 석방을 위해 노력했으며, 의거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미주 사회에서도 상무적인 분위기가 조성됐다. 선생은 1912년,  네브라스카에 한인소년병학교 간부로 군인양성을 위해 힘쓰는 한편, 1913년 링컨시의 네브라스카주립대학에 입학했다, 이듬해 7월 신한민보의 주필로 항일 논설을 썼다.

1915년 1월 주필직을 사임한 뒤에는 UC 버클리 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며, 상항한인감리교회 청년회 학문국장,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중앙총회 대의원, 버클리 한인학생양성소 설립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미주 한인사회에도 재정모금 등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재정적 지원을 했는데, 선생은 상해로 떠난 안창호 선생을 대신해 미국, 하와이, 멕시코 지역 독립운동의 사령탑을 맡았다.

1919년 3월부터는 신한민보에 한국경제사를 연재해 이듬해 책으로 발간했다. 한국경제사는 국내외 최초의 한국경제사 서적으로 궁극적으로 ‘국가독립’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1926∼33년 8년간 북미지방총회 총회장과 신한민보사 사장 겸 주필로서 미주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활약한 선생은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며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로스앤젤레스로 와서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에 참여해 조선의용대의 재정적 지원을 위해 앞장섰다.

이후 기관지 ‘독립’의 발기인이며 주요 논객으로 활동하는 등 항일언론과 한인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헌신했다.

해방 후에도 선생은 하와이 국민회 기관지 ‘국민보’의 주필로 활동하는 등 재미동포를 위해 헌신하다 1962년 5월 31일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