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혼란한 와중에 한국과 미국은 지난달 30일부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위해 머리를 맞댔고 다양한 잡음 속에서 지난 3일 오전(현지시간) 재협상이 타결됐다.
자동차 시장을 대폭 양보해 이익 균형점이 깨진 상황에서 민감한 쇠고기 문제가 다시 거론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만 이번 협상에서 쇠고기 문제는 제외된 것으로 밝혀졌다.
양국은 연내 타결을 목표로 막판까지 협의점을 찾지 못해 난항을 거듭했다. 협상이 길어지자 기간을 하루 더 연장하는 등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 진통을 겪었다.
이로써 2007년 6월 30일 양국이 협정문에 서명한 것을 시작으로 3년 이상 비준이 지연되어 왔던 한미 FTA는 정식 발효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야권과 시민사회단체의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아 국회 비준절차에 진통이 예상된다.
‘시점’ 논란
현지시간으로 지난달 30일 한국과 미국은 한미 FTA 쟁점현안의 해결을 위해 추가협상에 들어갔다. 이 즈음해서 한미연합훈련이 사흘간의 일정으로 서해에서 지난달 28일부터 지난 1일까지 진행됐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시기’를 놓고 말들이 많았다. 북한의 도발로 미국의 군사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서 한미 FTA 재협상은 이미 미국이 일방적 우위에 서있게 돼 굴욕적인 협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난 3일에는 한-미 FTA 재협상이 하루 연장된 가운데 미 상원이 제출한 연평도 포격 규탄 대북결의안에 한-미 FTA 조속타결을 촉구하는 내용이 포함돼 문제가 됐다.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 양국 간 FTA가 조속히 타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통상교섭본부가 굳이 이런 시기를 선택한 것이 사실상 협상시기가 불리했다는 면죄부를 얻기 위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의 핵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가 한 번 기동하는데 드는 비용이 1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이에 일부 정치권에서는 미국이 아무런 대가 없이 이 같은 ‘협력’을 베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민주노동당은 지난 1일 대변인 논평을 통해 “돌아보면 지난 6월 한미 FTA 재협상을 시작한 배경은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건에 대한 미국의 협조가 절실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며 “미국이 아무런 대가없이 핵 항모를 서해까지 기동시켰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국민은 아무도 없다. 한 손으로 핵 항모를 구걸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강한 협상력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는 국민도 없다”고 주장했다.
민주당도 지난 1일 한미 FTA에 대한 민주당의 입장을 밝히며 “연평도 포격으로 미국의 군사협력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최되고 있는 한미 FTA 재협상은 협상의 기본조건인 객관적, 중립적 환경조차 갖추어지지 않은 굴욕협상”이라고 폄하했다.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은 지난 2일 CBS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설정한 시한에 따라서 미국이 제시한 의제에 따라서 미국이 요구하는 내용에 일방적으로 우리가 수용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협상이라고 한다면 해서는 안 된다”며 “FTA 재협상의 시점은 너무너무 잘못 택한 것”이라고 정부를 비판했다.
지난 2일 한국 대표단은 미국의 자동차 관세철폐 기간 연장 요구에 농산물 분야를 양보하라고 맞서는 등 이익 절충점을 찾기 위한 협의를 진행했다. 다행히 자동차를 비롯한 제한된 분야에 실질적인 성과를 거뒀다고 하지만 결과에 따라 한미 양국의 정치권 반응은 또다른 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쇠고기 협상, 일단 제외?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과 미국의 론 커크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중심으로 한미 FTA 협상대표단은 지난달 30일 메릴랜드 주 컬럼비아시의 한 호텔에서 만나 이틀간의 일정으로 협상을 시작했다.
이번 협상에서는 자동차 부문의 이익 균형점 절충과 한국 내 쇠고기 시장 확대 등으로 양측이 막판까지 치열한 힘겨루기를 벌였다. 이번 협상은 12월 1일까지 이틀 일정으로 진행됐지만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데다가 연내 타결을 위해 하루가 더 연장됐다.
이날 양측의 주요 쟁점은 한국산 자동차의 관세철폐기한 연장이었으나 미국은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쇠고기 문제를 의제로 삼아 협상이 지연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종훈 본부장은 회의 기간 동안 “쇠고기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 “논의가 없었다”고 말했지만 과거 김 본부장이 협정문의 점하나 고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가 재협상까지 오게 된 정황을 미뤄 그의 발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평이 많았다.
야권에서는 쇠고기 분야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쏟아내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어찌됐든 실제 쇠고기 분야는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으로 기존에 체결된 한미 FTA의 협정문은 일부 수정이 불가피해 적지 않은 논란이 예상된다.
미국 정치권에서도 자동차와 쇠고기 등 주요 쟁점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갖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해결을 촉구한 바 있어 의회 비준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탄의 대상 ‘김종훈’?
한-미 FTA 재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이익균형’의 발언을 하면서 야권은 어이없다는 반응을 내놨다. “퍼줄 거 다 퍼주고 이제 와서 무슨 ‘이익균형’이냐”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지난 1일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독소조항으로 가득 찬 한미 FTA를 김종훈 본부장이 국익에 부합하는 공정한 FTA 라고 생각했다면, 이는 그 국적이 의심스러운 대목일 수밖에 없다”며 기존 협정문 자체가 굴욕이라고 표현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22일 민주노동당은 “밀실 굴욕 퍼주기 협상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만큼,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을 즉각 해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민주당도 지난 1일“밀실?굴욕협상의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할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협상대표로 나선 것 자체가 이미 우리의 일방적인 양보를 전제로 한 것”이라며 김 본부장의 사퇴 요구 발언을 이어갔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달 “상생법이 통과되면 한-EU FTA와 관련해 통상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실제 상생법과 한-EU FTA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본부장의 발언이 문제가 됐던 건 이뿐이 아니다. 협정문의 점하나 고치지 않겠다고 공언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의 말과 달리 지난달 19일 정부가 한미 FTA의 재협상을 공식화하면서 야권은 물론 여당에서 조차 김 본부장의 발언을 문제 삼아 해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지난달 22일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에서 “김종훈 본부장이 3년 반 동안 국민을 속이고 사과 한마디도 없이 재협상을 하면서 협상 전략이라고 한다”면서 “국민을 속인 것이 전략의 일환이었다면 김 본부장을 해임하고 새로운 협상팀을 꾸리는 게 우리의 협상 전략이 아니겠냐”고 당시 답변에 나선 김황식 국무총리에게 반문했다.
앞서 최석영 외교통상부 FTA 교섭대표는 김 본부장의 문제가 된 발언에 “협상전략상 그렇게 발언한 것”이라며 이해를 요구했다. 처음부터 협정문을 고치겠다고 하면 미국과의 협의 범위가 확대될 수 있고 국내에서도 반대여론에 부딪힐 수 있어 문제를 사전에 차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협상 사실과 쇠고기 부문의 협상 의제화 문제도 일관되게 부정하다가 미국 측의 언론 보도를 통해 드러난 이후 인정한 것은 전략상의 문제로 볼 사안이 아니라는 분석이다. 미국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는 모양새가 ‘협상전략’을 무색케한다는 것이다.
일단 한미 FTA 재협상이 타결되고 쇠고기 문제가 제외됨으로써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에 대한 비판 여론은 최대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한편 여야 간 입장차가 워낙 커 국회 비준동의 과정에서는 험로가 예고되고 있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가 지난해 4월 한미 FTA 비준안을 의결해 국회 본회의에 올렸지만, 이번 추가협상에서 FTA 협정문 내용이 일부 수정되면서 재비준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합의에서 한국은 자동차 분야에 상당 부분 양보를 했고 농산물 등 일부 분야에서는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켜 표면적으로는 ‘이익의 균형’을 이룬 모양새를 갖췄다. 또 쇠고기 분야가 협상에서 제외돼 국민적 우려를 차단했다.
하지만 이미 서명을 마친 협정문에 다시 손을 대 차후 다른 국가들과의 협정에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것은 큰 오점으로 지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