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에 사태의 책임론을 놓고 당정청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뿐 아니라 예산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시한 내 처리에 집착한 나머지 예산이 지나치게 편중되거나 주요 예산이 누락되는 등 문제가 속속 불거져 나오면서 한나라당은 궁지에 몰리고 있는 형국이다.
최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12월 둘째 주에 실시한 주간 정례조사 결과에서 한나라당은 전 주(42.6%) 대비 3.8%p 하락한 38.8%를 기록, 전주대비 1.9%p 상승한 민주당(26.3%)과의 격차가 12.5%p로 전 주(18.2%p)보다 크게 줄었다.
이와 함께 이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 못하고 있다는 부정평가는 45.0%로 전 주(41.8%)대비 3.2%p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불거지는 ‘당 책임론’
이번 파문으로 안상수 대표는 곤혹스러운 눈치다. 지난 12일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당직 사퇴를 표명하며 사태 진화에 나섰지만 야권의 반발과 여론을 무마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안 대표와 당 운영 문제로 잦은 충돌을 일으켜온 홍준표 최고위원은 지난 13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진단, 당의 책임론을 명확히 했다.
홍 최고위원은 이날 “새해 예산이 상호폭력 속에서 통과된 점에 대해 여당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 여러분들에게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면서 “대화와 타협으로 원만하게 예산국회를 마무리 하지 못하고 조급하게 강행처리한 우리의 잘못이 더 크다는 점에 대해 깊이 반성하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이번 예산 국회는 과정의 폭력도 문제지만, 예산의 내용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최근 이와 관련한 언론의 보도가 서민예산의 누락과 당의 실세지역구에 SOC(사회간접자본) 예산이 증액됐다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한데에 따른 것으로 보여진다.
홍 최고위원은 이에 대해 “만약 그렇다면 이번 예산안 통과의 정당성이 이것 때문에 더욱 저감됐다”며 정부의 심사 없이 증액된 이 같은 예산에 집행유보를 요청했다.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템플스테이 예산과 관련해서는 “템플스테이 예산 감액과 춘천∼속초간 고속화철도 기초설계 용역비 30억 미반영은, 돈 문제가 아니라 불교계와 강원도민의 자존심 문제”라며 “예산을 어떻게 집행하는가 그 문제에 앞서서 우선 당이 불교계와 강원도민에게 그 잘못을 빌고 바로 시정을 해야 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는 이어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당이 독자성을 상실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과연 당이 의원들의 중지를 모아 독자적으로 운영이 되고 있는지, 소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독자성을 잃고 끌려 다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번 파동의 책임자로 사퇴한 고흥길 정책위의장의 사퇴 문제와 관련해서도 홍 최고위원은 당이 정해야 할 문제라며 “당의 지도부는 조롱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되고 더더욱 맹종의 대상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말했다.
또 일각에서 이번 예산파동의 책임을 기재부로 돌리는 것에 대해서 “기획재정부 입장은 예산을 관료적인 입장에서 처리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국민적 시각에서 고치는 것이 국회와 당의 책임”이라고 강조, 국회와 당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YS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된 96년 노동법의 기습처리를 예로 들며 “이제부터라도 이명박 정부가 성공을 하고 다시 96년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부 전에 여당을 재편하고 전열을 재정비할 때”라고 밝혔다.
당 내에서는 이번 사태로 엉뚱하게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사퇴한 것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큰 것으로 전해졌다. 또 지도부의 사퇴 요구까지 불거져 나오면서 혼란이 가중되는 양상이다.
특히 여론에 민감한 수도권 초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사실상 차기 총선에 안상수 체제로는 안된다는 인식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안 대표는 이미 ‘보온병’ 논란으로 문제가 된 상황에서 이번 예산안 강행처리로 후폭풍도 만만치 않아 난감한 상황이다.
지난 16일에는 남경필, 홍정욱 의원 등 한나라당 국회의원 22명이 이번 예산안 파동과 관련, 향후 예산안 강행처리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지키지 못하면 19대 총선에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해 지도부를 당황케했다.
야권 대여 공세 수위 ‘최고조’
야권은 전국적인 장외투쟁을 본격화했다. 전국을 돌며 규탄대회를 갖고 연일 여당의 예산안 강행처리를 성토하고 있다. 또 여론을 동원해 여당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민주당은 손학규 대표가 서울광장에서 100시간 동안 사죄와 결단의 시간을 갖는가 하면 서울광장과 서울역, 그리고 용산역에서 4대강 예산, 날치기 법안 무효화를 위한 거리행진과 서명운동도 전개했다.
지난 9일부터 서울광장에서 100시간 천막농성을 시작했던 손 대표는 지난 14일부터는 전국 순회투쟁을 이어갔다.
민주당의 전국 규탄대회는 14일 인천을 시작으로 15일에는 대전ㆍ충남, 16일에는 부산ㆍ울산, 17일에는 전북, 18일에는 경남, 19일에는 광주ㆍ전남 등으로 이어지며 연말까지 지속적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민주노동당도 지난 15일부터 ‘예산안 날치기처리 무효’와 ‘이명박 정권퇴진’을 위한 국민보고대회를 열며 대여 공세 수위를 높였다.
이러한 국민보고대회는 지역에 내려가서 지도부와 의원단이 합동기자회견을 갖거나 16개 광역시도당의 상징도시, 주요거점에서 정당연설회 형식으로 진행된다.
민주노동당은 “지금 광범위한 각계각층 국민들, 종교인 그리고 환경단체가 4대강 날치기 분노가 확대되고 있다”며 “지역별로 비상시국회의가 야4당 야5당 차원에서 개최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민노당은 16일 부산에서 야4당 시민사회규탄집회를, 17일은 광주와 울산에서, 18일에는 서울과 경남창원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민중대회 형식의 야5당 대회를 진행, 연말까지 이어나갈 계획이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14일 인천에서 열린 ‘이명박 독재심판 인천 결의대회’에서 “이번 12.8 날치기의 핵심은 예산안을 빨리 처리하는 게 아니라 대국민 공갈 협박”이라면서 “이명박 정권의 독재를 물리치자”고 주장했다.
이에 한나라당은 예산안의 회기 내 통과 불가피성을 강조하며 야당의 공세에 반박, 여야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하지만 여당 내에서도 지도부 인책론과 당·청 관계의 재정립에 대한 목소리가 큰 만큼 한나라당 지도부는 일단 사태를 예의주시하면서도 말 그대로 ‘진퇴양난’에 고립된 모양새다.
특히 내년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놓고 이 같은 충돌이 재연될 우려가 있어 끝을 알 수 없는 정국 경색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