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취해 도예 인생걸어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취해 도예 인생걸어
  • 민경범
  • 승인 2005.04.1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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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그리고 물과 불이 만난 진사백자 구현
백자는 작가의 감정표현과 대상의 소재가 다양하다. 고려시대가 청자문화라면 조선시대는 백자문화로 도자기문화의 꽃을 피워왔다. 우리민족의 도자기문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수한 도예기술로 일본은 물론 전세계에 걸쳐 그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백자는 흙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 물론 유약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도자기의 기본 재료인 흙은 크게 백자토, 청자토, 조합토(조형토)가 있고 같은 백자토라도 성분에 따라 더 밝은 색을 띠기도 하고 약간 유색을 띠기도 한다. 백자는 고려시대부터 제작되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세련되고 완성미를 완벽히 갖추기 시작했다. 조선시대는 백색을 하늘의 색, 즉 우리민족이 하늘의 자손임을 나타난다고 생각하여 특히 애호하였고 유교의 영향으로 가장 순결하고 충효정신이 깃든 백색 자기가 백성들의 정서와 함께 그 문화를 이루었다. 고려시대에 청자가 귀족들의 전유물이라고 한다면 백자는 서민들의 심성까지 수용한 폭넓은 문화의 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백자의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에 취해 30여년째 조선백자의 맥을 이어가며 끊임없는 개발과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임항택 명장(항산도예연구소장). ‘처음에는 장식없는 무심한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백자의 격을 발견하기도전, 청자에서 먼저 명채도가 높은 붉은 진사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지요. 온몸을 태워버릴 듯한 처절한 선홍의 붉은 색에 내 자신이 먼 우주의 미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전율을 느끼면서 지금까지도 그 붉은 한점이 내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며’ 백자에 대한 남다른 예찬론을 펼치고 있는 임 명장은 지난 2004년 ‘백자 진사’ 부문에서 도예명장으로 선정된 이 시대 최고의 조선진사백자의 연구인이다. 임 명장이 도자에 처음 입문한 것은 72년 조선일보에 실린 운보선생의 백자전시회를 보고 조선백자가 전승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다. 당시 미술교사였던 임 명장은 각종 잡무에 치여 국전 준비 등 작품활동도 제대로 못하게 되자 75년 교편생활을 접고 오로지 조선백자를 연구해보겠다는 일념으로 시작됐다. ‘단아한 백자의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에 취해 조선백자를 연구하고자 교직을 떠났지만 그때만 해도 백자를 생활수단으로 삼아 미술활동을 더 하겠다는 생각으로 전통도자기의 고장인 이천으로 왔다. 그러나 막상 시작해보니 백자의 아름다움과 선홍색 진사에 탐닉하게 됐다’고 임명장은 말한다. 백자의 품질향상 기여 백석 이정하 선생에게 조선백자의 제작기법을 사사받은 임항택 명장은 항산도예연구소를 설립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통가마에 의한 진사개발에매진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차례 해외전시회를 통해 우리 도자기의 우수성을 홍보하는데 크게 공헌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백자의 품질향상 및 공정개선실적으로도 도자기 관련 실용신안등록과 의장등록, 진사부분 특허를 출원하고 진사안료 개발과 전통가마의 구조개선을 통해 작품성공률을 높였다. 이와함께 소성방법의 개선으로 소성시간단축 및 가마의 수명을 2배이상 향상시키기도 했다. 임항택 명장은 백자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진사작품에 관한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백 번을 지펴도 백 번을 다른 모습으로, 또 다른 길로 타오르는 불꽃처럼 무한한 변화와 실패의 연속을 맛보기도 했지만 진사연구는 끊없는 도전’이었다. 백자진사는 전통가마에서만이 나올 수 있다 ‘백자는 청자에 비해 그 표현력은 다양하다. 특히 작가의 사상과 이념 그리고 감정표현이 무한대이고, 백자에 그려질 그림의 대상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청자보다도 백자를 선택하게됐다’는 임항택 명장은 ‘백자는 와목점토,산화동,도석,소나무재,규석,중크롬 등 진사안료의 성분조합만으로 작품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가마 안에서 재임하는 방법, 기압, 습도, 땔감인 적송의 마른 상태 그리고 불을 때는 도공의 마음이 마치 수행자의 평정심에 따라 진사의 색감과 색상이 달라진다’며 지금도 이천에서 몇 안되는 전통가마를 고수하고 있다. ‘흙 그리고 물과 불’이 혼연일체가 되어 만들어지는 진사작품은 전통가마에서 장작을 때야만 나올 수 있다는 임항택 명장의 신념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은 도자기의 성분분석기며 컴퓨터의 도움으로 방대한 자료축적으로 분석이 가능하고, 적외선 분광분석기로 측정한 수치화 된 빛의 파장의 범위로 색상을 확인하고 실패율을 줄 일수 있지만, 예전에는 끝없는 실험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이처럼 숫한 좌절과 실패로 인한 정신수양이 있었기에 정념의 넋인자신만의 진사작품이 완성되어지는 것 같다‘고 임항택 명장은 말한다. 예술활동은 외줄타기와 같은 것 ‘예술활동은 정해진 길이 없다. 다만 끊임없는 도전정신만이 갈 길이다. 마치외줄타기와 같은 예술활동은 부채나 댓가지 같은 보조도구 없이 작품성과 경제성의 상관관계를 함축하면서 끊임없이 보여 줘야하는, 아니 떨어지지 않고 줄 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고독한 한 길’이라고 강조하는 임항택 명장. 진사작품이 작품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까지는 수많은 인고의 세월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조선백자의 전통과 진사 그리고 전통가마에 대한 이해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전통가마를 이어갈 수 있었다는 임항택 명장은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가마 앞에서만큼은 엄격한 예술혼을 불사르고 있다. 가업으로 조선백자 이어갈 터 임항택 명장은 후진양성을 위해 연구소에서 각종 기능대회에 출전, 입상자를 배출하는 한편 조선백자의 맥을 가업으로 이어가기 위해 일본 아리따요업대학을 졸업하고 8년째 임항택 명장의 곁에서 수업중인 장녀 임창랑씨를 지도하고 있다. 임창랑씨는 그림은 물론 성형과 조각에도 재질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진사란 산화동, 산화석 와목 등이 1270°의 불 속 환원염에 붉고 맑은 적색을 띈 것을 말하는 것으로 12세기 중엽 고려 왕조 때 도자기에 목단, 국화 등 꽃의 화심, 화룡점, 청의 효과를 내던 귀한 재료로 처음 등장했다가 13세기 고려왕조의 몰락과 함께 없어졌다가 17세기 조선왕조의 국가기반이 안정되는 시기에 다시 나타났다가 1883년 관요가 폐지되고 70년 정도 맥이 끊겼던 진사의 맥이 다시 살아난 것이 1950년대 초반이다. 이후 1980년대를 기점으로 전통가마에서 기계식 가마로 소성방법이 변화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편 임항택 명장은 이천에서 2002년 김세용씨와 2003년 서광수씨에 이어 3년 연속 명장을 배출한 도자기 고장으로써 그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진사백자의 끝없는 연구활동을 통해 장인정신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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