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재벌가 딸들의 활약이 대단히 두드러지고 있다. 과거 가부장적인 대기업 오너 일가들도 서서히 변하고 있다. 이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는 현 세태를 적극 반영하고 있다는 시각이 많다. 아직 일부 대기업은 여성의 경영을 사실상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경영에 참여해 뚜렷하게 맹활약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재계에는 여성 3세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등 범삼성가 3세를 필두로 조현아 대한항공 전무, 조현민 대한항공 상무보, 정지이 현대 U&I전무 등 재계 여성 3세들의 경영 행보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전문지식 바탕으로 활약
그런데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 중인 재계 여성들은 대개 패션과 마케팅, 서비스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재벌가 남성들이 경영 전면에 전격적으로 나서는데 비해 아직 여성들만의 특정 분야가 정해져있는 셈이다.
이를 반영하듯 재계 여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교육을 받아왔다. 신세계백화점 광고 및 마케팅 부문 총괄인 정유경 부사장은 예원중학교·서울예고·미국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을 나왔다.
제일모직에서 패션 부문을 맡은 이서현 부사장은 서울예고·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했다. 현정담 동양매직 상무는 미국 스탠퍼드 경영학석사(MBA)를 마치고 동양매직 마케팅본부에서 브랜드 관리와 디자인 경영 부문을 맡고 있다.
조현아 대한항공 전무는 예원중학교·서울예고·미국 코넬대 호텔경영학과를 졸업했다. 현재는 대한항공에서 기내 서비스와 호텔 사업에서 보폭을 넓히고 있다. 조양호 회장의 막내딸이자 조현아 전무의 동생인 조현민 대한항공 상무보는 미국 남캘리포니아대(USC)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이후 광고기획과 마케팅 분야에서 쌓은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대한항공 통합커뮤니케이션실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비록 아직 영역이 한정되어 있지만 이들의 행보가 더욱 관심을 끄는 이유는 부모 세대 여성들이 내조를 통해 재벌가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한 것에 비해 이들은 스스로 경영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재계에 돌풍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감각 뛰어나
특히 재벌가 딸들 중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는 이들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안 분위기가 딸들의 경영 참여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세계·현대그룹·동양그룹 등 어머니나 외가의 영향력이 있는 그룹은 딸들도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정지이 현대U&I 전무는 각각 대표적인 재계의 파워우먼으로 꼽히는 이명희 신세계 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딸이다.
또한 현정담 동양매직 상무, 현경담 동양온라인 부장의 어머니인 이혜경 동양레저 부회장도 결혼 후 내조에 만족하지 않고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남편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과 함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의 이모이자 이혜경 부회장의 여동생인 이화경 오리온그룹 사장도 재계의 파워우먼 중 한 명이다.
해외유학을 통해 글로벌한 감각을 연마한 사람도 많다.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조현아 대한항공 전무·조현민 대한항공 상무보 등이 해외에서 학위를 받았고 STX 강덕수 회장의 장녀 강정연 씨는 현재 미국에서 유학중이다.
이들 중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활약을 펼치는 재벌가 딸들은 단연 삼성가와 한진가가 첫손으로 꼽힌다. 삼성가의 맏딸인 이부진 호텔신라 겸 삼성에버랜드 사장은 현장 경영을 철저하게 중요시하는 스타일이다.
이부진 사장은 2010년 면세점 사업과 에버랜드, 유통 등 분야에서 믿음직한 모습과 이에 어울리는 성과를 일궈냈다. 인천공항 면세점 입점(호텔신라)을 성공시킨데 이어 프라다 등 명품 브랜드를 유치한 것이 대표적인 성과로 꼽힌다.
한진가 딸들 활약 두드러져
이 사장은 루이뷔통 모에 헤네시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방한했을 때 직접 인천공항에서 만나 공항 내 호텔신라 면세점에 루이뷔통 매장을 유치하는 작업을 이끌기도 했다. 삼성에버랜드에서는 푸드컬쳐 사업부(급식, 식음료 유통)와 리조트 사업부(테마파크, 골프장) 등으로 조직을 다시 정비하는 한편 지난해 상반기 1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서현 제일모직·제일기획 부사장은 전공 분야인 패션에서 개성 넘치는 경영 행보를 보여 주목받고 있다. 이 부사장은 지난 2008년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복합편집매장 ‘10꼬르소꼬모’를 시작으로 미국 브랜드 ‘릭 오웬스’ ‘토리버치’ 등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잇달아 오픈했다.
또한 지난해 이서현 부사장은 디자이너 브랜드인 ‘구호’를 ‘헥사 바이 구호’라는 브랜드로 미국 뉴욕시장에 진출시키기도 했다. 이 부사장은 패션 사업의 글로벌화를 주도하면서 언니 못지않은 경영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한진그룹의 장녀인 조현아 대한항공 전무는 아버지인 조양호 회장과의 호흡이 무척 잘 맞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 전무는 지난해부터 대한항공 기내식 및 그룹 호텔사업부문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조현민 상무보의 경우는 번득이는 아이디어로 그룹 내에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고 재계는 입을 모은다. 작년에 대중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TV광고-뉴질랜드편’이 대표적인 사례다.
앞으로 활약 기대돼
당시 조현민 상무보는 뉴질랜드에서 진행한 TV광고 촬영에 함께 갔다가 현장에서 캐스팅돼 광고에 출연했다. 원래는 현지 모델을 쓸 예정이었으나 “한국인이 좋겠다”는 촬영 스태프의 의견을 받아들여 직접 번지점프에 몸을 던져 화제를 모았다.
또한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 ‘중국, 중원에서 답을 얻다’ ‘지금 나는 호주에 있다’ ‘유럽 귀를 기울이면’ 등 지난해 히트한 대한항공 TV CF의 대부분이 전부 조현민 상무보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밖에 정지이 현대U&I 전무는 현 회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어깨 너머로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특히 지난 2005년부터 현 회장의 방북에 동행하며 참모 역할을 성공적으로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정 전무는 현 회장의 뒤를 이어 대북사업의 중책을 맡을 것”이라는 전망이 재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한편 재벌가 여성들의 활약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재계 3세 여성들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 재벌가의 일원으로만 그치지 않고 한 기업의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싶어 한다”며 “남성에 비해 숫자는 대단히 적은 편이지만 앞으로 이들의 활약은 재계의 새로운 트렌드로 시금석 노릇을 톡톡히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