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9년 발생한 동아건설 재경팀 부장 박모씨의 1890억원대 횡령 사건과 관련 당시 박씨에게 속아 잘못된 계좌로 회삿돈을 입금한 신한은행이 동아건설에 일부 횡령금액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에따라 신한은행은 이 판결이 확정될 경우 890억원대의 손실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9부(손지호 부장판사)는 12일 신한은행이 동아건설산업과 이 회사 자금부장이던 박모씨, 자금과장이던 유모씨를 상대로 낸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에서 "유씨와 박씨가 신한은행에 898억원을 지급하고 신한은행은 이 돈을 동아건설과의 신탁계약에 따라 지정한 계좌에 입금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신탁금을 지급하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박씨가 보낸 서류만 믿고 위조된 동아건설 계좌로 거액을 입금했다"며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신탁금 지급통지에서 송금리스트가 누락됐음을 쉽게 확인해 동아건설측을 위한 지급이 아닌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신한은행, 신탁금 지급하면서 필요한 조치 취하지 않아"
재판부는 "신한은행이 박씨 등의 요구에 따라 동아건설 명의의 계좌에 입금한 898억원 중 477억원을 임의로 사용했다"며 "은행은 신탁금을 신탁계약서의 수익자에게 지급해야 하는데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결국 신탁재산이 줄어들게 했으므로 이를 회복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결국 신한은행을 속이고 다른 계좌로 회삿돈을 빼돌린 박 부장에게 일차적인 배상 책임이 있지만 동아건설에 대해 직원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사용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앞서 2007년 11월 동아건설은 회생절차가 개시될 당시 한국자산관리공사 등 141명을 수익자로 지정하는 특정금전신탁계약을 신한은행과 맺었고 은행은 이에 따라 1천687억원을 받아 계좌에 입금했다.
그런데 2009년 3 이 계좌에서 수익자가 아닌 동아건설 명의 계좌로 898억원이 이체됐으며 박씨는 이 돈을 빼돌려 쓰기로 고교후배와 공모하고 회사 예금통장을 허위로 분실신고한 뒤 새 통장을 발급받으면서 예금을 해지하는 방식으로 477억원을 찾아 써버렸다.
그는 결국 회삿돈 1천898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22년6월과 벌금 100억원이 확정됐지만, 신탁자금 손실을 두고 신한은행과 동아건설은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
이에 신한은행은 신탁금이 채권자에게 정상적으로 지급되는지 확인하는 것은 은행의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동아건설의 대리인인 박씨의 지시에 따라 신탁금을 송금한 것은 정당하며 잔액을 초과하는 신탁금 지급 의무가 없음을 확인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동아건설 또한 신한은행이 신탁금을 송금해달라는 박씨 등의 지시가 정당하지 않다는 점을 알지 못하고 송금했기 때문에 898억원을 돌려달라고 맞소송을 냈다.
한편 회사공금을 빼돌린 전 동아건설 자금부장에게는 법정최고형이 내려졌다. 서울동부지법 제11형사부(부장 정영훈)는 지난해 7월 12일 회삿돈 1898억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 동아건설 자금부장 박씨에게 횡령과 사기 혐의로 22년6월의 징역형과 함께 벌금 100억원을 선고했다.
박씨의 횡령을 도운 전 동아건설 자금과장 유씨와 하나은행 직원 김모씨는 각각 징역 7년과 5년을 받았다. 재판부는 횡령에 대한 최고형인 15년에다 사기죄로 2분의1 형량(7년6월)을 가중해 유기징역으로는 법정최고형을 내렸다.
"자금부장 박씨, 횡령금 도박 탕진 도덕적 해이 극치"
당시 재판부는 "박씨는 2008년 회사가 유동성 위기를 겪어 수많은 공적자금이 투입된 상황에서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돈을 횡령해 회사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채권자들의 투자금 회수 기대 역시 좌절시켰다"며 중형선고 이유를 밝혔다.
이어 "횡령한 돈의 상당 부분을 해외원정 도박으로 탕진하는 등 도덕적 해이의 극치를 보여줬고 이를 변제하려는 노력도 없었다"며 "겉으로는 반성하는 척하면서도 진상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박씨는 2004년 9월부터 2009년 6월까지 출금청구서를 위조하거나, 제3자의 허가가 있어야 예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인 '질권'을 서류상으로만 허위로 설정하는 방법으로 회사 운영자금 523억원과 은행예치금 477억원, 신탁자금 898억원 등 회삿돈 1898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지난해 10월 구속기소됐다.
박씨는 검찰조사에서 빼돌린 돈 가운데 929억원은 횡령사실을 숨기기 위해 다시 회사 계좌로 입금하는 '돌려막기'에 사용했고 나머지 금액은 카지노 도박, 부동산 구입 등에 썼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검찰은 회수되지 않은 970여억원 대부분을 박씨가 은닉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형평성 안 맞아, 항소할 것"
한편 신한은행은 이번 법원 판결에 대해 항소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16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아직 판결문이 오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판결문을 검토한 다음 항소를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자금부장의 불법행위를 방조한 동아건설에게도 어느정도 과실이 있다고 본다"며 "신한은행에게만 책임을 부가한건 형평성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