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에 보내는 짧은 편지들
김황식 현 법원행정처 차장이 광주지방법원장으로 재직당시 매주 월요일에 내부통신망을 통해 정기적으로 직원들 앞으로 보낸 이메일의 내용을 묶은 책이 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책제목인 지산통신(芝山通信)은 김 차장이 광주지방법원이 소재한 광주 동구 지산동의 이름을 따서 지었던 이메일제목으로 법원행정문제에서 사회를 보는 따스한 시선이 담겨져 있다.
우선 지산통신에는 김 차장이 지난해 1월18일 광주지법원장에 부임한 이래 지난 7일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전보되기 직전까지 광주지법 직원들에 보낸 73건의 이메일 내용이 담겨있다. 특히 김 차장이 평소에 느껴왔던 법원업무에 대한 개선방향은 물론 직원들에 대한 애정 어린 질책, 직원들과의 대화과정에서 느낀 감회 등을 소탈하게 풀어내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
이와 관련 광주지법 여직원회 박현옥 회장은 “법원가족이 어떻게 생각하고 업무에 임해야 하는지에 대한 훈시가 있지만 눈시울이 뜨거울 만큼 감동적인 내용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또한 “용기와 지혜를 주는 내용이 많아 매주 월요일 출근해서 이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기대감에 설레기도 했었다”며 “당시를 돌이켜보고 싶은 마음에 출간하게됐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산통신에는 김 차장의 요청에 의해 법률현실을 알리기 위해 지역일간지에 연재한 김 차장과 광주지법 판사 25명의 ‘판사가 말하고 싶은 법과 시민사회’라는 칼럼도 포함됐다.
■ 중도저파(中道低派)
70년대 후반 독일의 집권당은 좌파로 분류되는 사민당(SPD)이었고 당시 제가 살던 헤쎈주의 집권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사회주의 내지 좌파라고 하면 어쩐지 좀 꺼림칙한 생각을 갖고 있던 저로서는 사회제도나 운영에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았으나 모든 게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우며 국민의 복지향상을 위해 진력하는 것을 보고, 물론 애당초의 사회주의에서 변형된 서구사회주의이긴 하지만, 사회주의란 것이 고약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우파인 기민당(CSU)측이 집권하고 있는 바이에른주의 뮌헨에서 공부하는 한국학생으로부터 우파정권이 외국인에 대하여 훨씬 까다로워 어려움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사회주의가 더 인간적인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좌우의 정당이 국리민복을 위해 경쟁하면서 번갈아 집권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였고 양자의 차이는 무게 중심의 조그만 이동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며 이를 지향하는 사회인 것이 분명하다면, 좌인가 우인가에 목을 메어 다룰 일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좌우 이념논쟁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가의 정책은 물론 개인의 성향까지도 어느 한쪽으로 구분하여 밀어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원래 우파니 좌파니 하는 말은 프랑스 혁명 직후 의회에서 보수적 성향을 띤 의원은 오른편에, 진보적 성향을 띤 의원은 왼편에 자리잡았기에 생겨난 것이고, 보수 내지 우익은 자유와 성장을 중요시하는 반면 진보 내지 좌익은 평등과 분배에 더 역점을 두는 쪽이었습니다. 그 실천방법으로 자유주의 내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가 경쟁하며 끝없이 진화 발전하면서 서로 수렴하는 과정을 거쳤으나 궁극적으로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승리하였습니다.
그것은 드러나는 모순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승리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부단히 변화를 모색하되 극단에 치우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성장과 분배가 조화를 이루며, 자본가와 노동자가 함께 하며, 기존 가치의 존중과 새로운 가치에의 모색이 자연스레 교차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입니다.
성경말씀대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면에서 극단을 싫어합니다. 스스로 중도이기를 원합니다. 중도라 하더라도 중도좌파, 중도우파 중 어느 쪽이냐고 동문(東問)한다면 소외계층을 보듬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도저파(中道低派)라고 서답(西答)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득한 이득에 연연한 우파 특히 극우는 추(醜)하고, 현실을 무시하고 꿈만 꾸는 좌파 특히 극좌도 철이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2004.10.22)
■ 자전거도둑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검찰청을 바라보노라니 30년도 훨씬 지난 옛일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구 검찰청에 연수생으로서 처음 부임한 날의 일입니다. 배당된 첫 사건이 14, 5세 남짓 소년의 자전거 절도 사건이었습니다. 소년은 양동에 살면서 학동에 있는 공장에 일하러 다녔습니다. 겨울에 광주천변을 따라 걸어가노라면 찬바람이 매서웠기에 소년은 자전거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우연히 길가에 세워진 자전거 한 대를 발견하고 그만 훔쳐 탔다가 이내 붙잡히고 만 것입니다.
가난으로 학교도 다니지 못하는 소년이 소박한 바램을 가지고 순간적으로 저지른 사건, 이런 사건이야말로 기소유예로 석방하여야 할 사안이 아니겠는가하고 지도검사에게 상의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도검사는 “김 시보의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감이오. 그러나 실무상 자전거 절도는 전부 구속 기소하고 있으니 그냥 빨리 기소하여 법원에서 빨리 풀려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피의자를 도와주는 것이오”라고 참으로 진지하게 저를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차장이나 검사장이 너무 깐깐한 분들이어서 제 의견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미리 정리해준 것이었습니다. 저는 무력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날 바로 기소하였습니다. 제가 소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호주머니에 있던 껌을 수갑을 차고 있는 소년의 입에 넣어준 것과 늦어도 한달 이전에는 법원에서 석방해줄 것이니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때 나이 보다 훨씬 어려 보여 더욱 안쓰러웠던 이 소년, 지금은 40대 중반일텐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사건을 생각하노라면 다시 떠오르는 영화 한편이 있습니다. 1948년 이탈리아 비토리오데시카 감독이 만든 “자전거 도둑”입니다. 이 영화는 2차 대전 직후 피폐한 로마를 무대로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실직 중 겨우 일자리를 얻게되는데 그 일에는 자전거가 절대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만 자전거를 도둑맞고 맙니다.
다시 실직의 위기에 몰린 아버지는 자전거를 찾으러 백방으로 돌아다니다가 길가에 세워진 자전거 한 대를 보고 이를 훔치다가 그 자리에서 붙들리고 맙니다. 사람들은 몰려들어 도둑이라고 욕하고 경찰에 넘겨야 한다고 소리치는 등 아버지는 한없는 수모를 당합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6, 7세의 어린 아들이 본 것입니다. 아버지와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아들의 눈길이 마주치는 장면입니다. 난처함과 안타까움으로 교류하는 그 눈길 속에서는 참으로 많은 대화와 위로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다행히 주인의 용서로 풀려난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들은 슬그머니 아버지에게 다가가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함께 피폐한 로마거리를 말없이 걸어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어렵고 고단한 삶의 현실과 따뜻한 인간애와 희망을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사에 길이 남을 영화라는 평가입니다. 비디오라도 구해 감상하시길 권합니다. 삶은 고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단함을 덜어주는 것은 사랑이 넘치는 가족관계 인간관계, 즉 인간애입니다.(2004.4.16) - 본문 내용중에서
■ 김황식(金滉植·57) 법원행정처 차장
사법부내에서도 부동산등기 및 독일법 분야의 전문가로 손꼽히고 있으며 최근 대법원 고위급인사에서도 차기 대법관으로 물망에 오를 정도로 안팎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및 인사관리실장으로 오랜 기간 재직하면서 사법행정에 대한 능력도 탁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사실상 법관 단일호봉제 도입을 성사시켰던 장본인이다.
특히 피고인의 인권보호에 관심이 깊고 피고인에 대한 무죄추정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는 판결을 해왔고 예술품 감상에 조예가 깊으며 부인 차성은(54)씨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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