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권 내 노사 대립이 본격화 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 은행권 최초로 성과연봉제를 도입하는 것을 놓고 SC제일은행 노조와 사측이 마찰을 빚고 있다. 이에 제일은행노조는 사측이 전직원에 대한 개별 성과급제와 후선발령제도 도입을 고집한다고 판단하고 이를 저지하겠다는 방침을 세우며 지난 6월 27일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은행 노조의 장기 총파업은 지난 2004년 6월 한미은행이 씨티은행으로의 인수를 반대하며 2주간 파업에 들어간 이후 7년만이다. SC제일은행측은 비노조원, 본사 직원 300여명, 노조원 가운데 파업 불참자 등을 각 지점에 투입하는 등 ‘컨틴전시 플랜’을 가동해 고객 불편을 최소화한다는 입장이지만, 파업이 장기화될 경우 고객 이탈, 대외신인도 및 브랜드 가치의 하락 등 막대한 손실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그동안 국내 은행업권에서는 사회적 공공성이 강한 업계 특성상 전면 총파업은 성사되기 힘들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현정부 출범후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금융권 노조 총파업에 은행가에도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SC제일은행 노조는 지난 6월 27일부터 성과 연봉제 도입을 전제로 한 사측의 임금단체협상안을 수용할 수 없다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지난 2005년 스탠다드차타드가 제일은행을 인수한 이후, SC제일은행은 부동산 자산매각과 지점폐쇄, 스탠다드차타드 영국 본사로의 무리한 배당 등으로 노조와 마찰을 빚어왔다.
현재 SC제일은행 392개 지점 가운데 절반가량인 45%의 일반 영업점에서는 입출금과 당좌거래만 가능하고 대출업무와 카드발급, 펀드 가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파업, 왜?
SC제일은행 노사 간의 갈등은 사측이 지난해 임금 단체협상에서 전 직원을 상대로 호봉제를 폐지하고 개별차등 성과급제를 제안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성과급제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임금 인상률과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는 연봉제다.
사측은 지난 24일 노조가 요구해왔던 성과관리 TFT구성, 직원의 고용안정 보장 등을 담은 최종협상안을 노조에 제시했으나 노조측은 이런 사측의 입장에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협상수정안은 TFT팀 구성 외에도 ▲ 구조조정은 없을 것이라는 점 ▲ 직원의 고용안정을 보장한다는 점 ▲ 평가모니터링위원회 운용과 평가제도에 대한 이의신청 실행 확대 등을 통한 성과평가의 공정성 추구 ▲ 합리적인 성과향상프로그램 운영 ▲ 학자금 실비지원 등 고용안정과 조직의 장기적인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방안들을 담고 있다는 게 사측의 설명이나 노조는 이를 두고 “한국의 정서를 무시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노조측은 “사측이 노조의 의견을 전격 수용하는 것처럼 자료를 냈지만 내년 1월 성과급제 도입을 전제조건으로 달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최하위 등급을 두 번 이상 받을 경우 퇴출되는 이 시스템은 결국 ‘구조조정’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노조는 “금융위기로 2008년 직원들의 연봉이 동결됐을 때에도 임원들은 수억 원씩 성과급을 챙겼다"며 “이 제도는 직원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경쟁력 향상을 위해 더 이상 성과급제 도입을 늦출 수 없다는 게 사측의 입장과 이에 반발하는 노조측이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면서 파업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금융계 한 관계자는 “파업이 드문 은행권임에도 불구하고 외국계 은행의 경우 한번 쟁의가 발생하면 장기전으로 번지는 경우가 빈번했다”며 “장기파업으로 인한 손실 및 고객이탈 등 다른 부수적인 문제점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노사간의 시각차를 좁혀야 한다”고 전했다.
실제 과거 호주계 은행인 웨스트팩은 노조의 파업이 5개월간 계속되면서 지난 1991년 1월 한국 사업을 접은바 있다.
한편, “SC제일은행의 모회사인 스탠다드차타드(SC)그룹이 성과연봉제 도입을 두고 대만에서도 노사간 갈등이 빚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금융노조는 6월 26일 “대만은행노동조합이 지난 22일 금융노조와 SC제일은행 노조 앞으로 연대서신을 보내왔다”며 “특히 대만은행노동조합은 대만스탠타드차타드(SCB)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과연봉제를 도입하려다 심각한 노동분쟁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했다”고 밝혔다.
‘금융문화’의 충돌
한편,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스탠다드차타드(Standard Chartered) 그룹은 150 년 넘게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및 중동지역 등 금융시장에 진출해 그룹 수익중 90% 이상을 올리고 있는 글로벌 은행으로 전세계 70여개 나라에 1천 700여개가 넘는 지점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 2005년 제일은행을 인수하면서 우리나라 금융계에 본격 진출한 SC그룹은 3조원이 넘는 인수자금을 포함해 지금까지 5조원 가까운 돈을 쏟아 부었고 2009년 6월에는 은행 이외에 증권과 캐피탈 등 5개 계열사를 거느린 금융지주사로 변신했다.
그러나 상당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만족할만한 수익을 얻지 못하자 SC그룹측은 지속적으로 성과급제 도입을 추진해 왔다. ‘성과주의’는 이 그룹의 성장 원천이기도 하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베트남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 자회사나 지점들은 정규직 직원 비중이 낮고, 점포도 소규모로 포진해 있는데 비용은 낮추고 생산성은 높이겠다는 포석이다.
하지만 은행에게 성과보다 공공적 측면을 더욱 요구해왔던 한국적 현실과 강렬한 노동운동 문화에 부딪치면서 번번이 무산돼 왔고 지금까지도 판이하게 다른 금융문화와 관련한 노사간 시각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리처드 힐 SC제일은행장은 “‘성과연봉제’ 도입을 관철시킬 것”이라며 “이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입각한 제도로 SC그룹 내 해외 지점들은 대부분 이를 정착시키고 있다”는 근거를 들었다.
그는 또 “최하 등급을 받아도 봉급이 삭감되는 것은 아닌데다 성과가 좋은 직원들은 더 많은 성과급을 받아 실질적으로 연봉인상 효과가 있는데 노조가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노조측에서는 지나친 성과주의로 인한 과당대출 경쟁과 성과급제가 합법적인 구조조정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 22일 영국의 FT(파이낸셜 타임스)지 기사는 “힐 행장이 다른 어떤 외국 은행 CEO보다 현지화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면서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호전적인 노조 앞에서는 아무런 방어막도 되지 못한다”고 보도했다. 업무효율성이 최대명제로 여겨지는 영국 금융계에서는 당연한 성과급제가 한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은행권이 구조적으로 이직이 다른 금융업에 비해 쉽지 않은데다 최근 은행간 인수합병으로 수많은 구조조정을 경험해온 특징을 모른다면 서구금융권에서 국내금융문화를 이해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라며 “SC제일은행 노사간에 형성된 전선이 은행권 전체로 확전되는 양상을 보일 수 있는 만큼 서로 금융문화 차이를 좁혀 협상타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