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딸들 ‘빵 전쟁’ 중소상인 상생경영 취지 무색
그룹 유통-자금력 바탕 돈벌이 쉬운 사업에만 ‘눈독’
삼성·롯데·신세계 등 재벌가 딸들이 최근 고급화된 카페형 베이커리 사업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이처럼 재벌가 3~4세들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대신 그룹과 특수관계를 이용해 안정적인 수익을 얻거나 외국브랜드의 사용권을 따내어 국내에 들여오는 방식으로 손쉽고 편한 사업에만 손을 대고 있다.
특히 재벌가 3~4세들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영역까지 침범해 최근 기업들 사이에서 불고 있는 상생경영이라는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어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롯데가(家) 3세인 장선윤(40) 사장이 재벌가 딸들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한복판인 고급 베이커리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고급 베이커리 사업은 ‘아티제’를 운영하고 있는 신라호텔과 이부진 사장과 ‘조선호텔 베이커리’를 이끄는 신세계 정유경 부사장 등 재벌가 딸들이 영역확장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다. 장 사장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장녀인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의 차녀다.
업계에 따르면 2008년 결혼과 함께 경영일선에 물러난 뒤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그런데 올초 장 사장은 식료품 제조회사인 ‘블리스’를 설립하고 대표로 활동하면서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현재 장 사장은 롯데백화점 내 베이커리인 ‘포숑’의 고급화 작업을 이끌고 있다.
롯데가 3세도 뛰어든 베이커리 사업
포숑은 10년전 롯데백화점 내에서 고려당이 위탁경영하고 있었으며 그렇게 고급브랜드가 아니었다. 그러나 식료품 고급화 전략과 맞물리면서 장사장이 설립한 블리스가 포숑의 운영을 도맡기로 하면서 신라호텔의 ‘아티제’나 조선호텔의 ‘달로와요’에 비교될만큼 고급형 베이커리 카페로 변신을 하고 있다.
장 사장은 지난 5월 롯데백화점 일산점 내 포숑 매장 리뉴얼을 시작으로 소공동 본점과 잠실점, 부산점 등 전국 12개 롯데백화점 점포 내 포숑 매장의 리모델링 작업을 모두 마쳤다.
이런 가정을 거쳐 재탄생한 포숑의 가격은 비싸졌지만 고급 취향의 백화점 고객들 사이에서 뛰어난 맛과 서비스 등으로 현재 인기를 끌고 있다.
매출도 크게 올랐다. 본전매장은 재단장해 올해 7월 20일 문을 연 뒤 한달만에 매출 2억 1000만원을 올려 리뉴얼 이전보다 2배 이상 뛰었다.
일각에서는 이같은 성과에 대해 오랜 하버드 대학교를 다니는 등 유학생활을 하면서 해외명품에 대한 안목과 롯데쇼핑 명품담당 상무로 재직하면서 오랫동안 명품전문가를 활동했기 때문에 남다른 면목을 가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딸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최근 커피 전문점 ‘아티제’를 통해 베이커리 고급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아티제’는 호텔신라가 100% 자본금을 출자한 자회사인 보나비가 직영하는 커피전문점으로 현재 강남권 중심으로 15개의 매장을 갖고 있다. 현재 홈플러스에 입점해 있는 아티제 브랑제리(신라호텔과 홈플러스의 합작회사)라는 베이커리도 호텔신라에서 지분의 20% 가까이 갖고 있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딸인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은 올 초 세계 수준의 프리미엄 식품점인 미국의 ‘딘앤델로카’를 신세계 단독으로 들여오는데 성공, 재벌 딸들의 베이커리 격전지에 뛰어들었다.
정 부사장은 올 하반기 신세계 강남점에 대형 매장 1호점을 열 계획이며, 매장은 식품, 카페, 케이터링 등을 다양한 분야를 다룰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정 부사장이 대주주로 있는 ‘조선호텔 베이커리’는 지난해 7월 조선호텔 외식사업부에서 운영하던 베키아앤누보와 페이야드까지 흡수하는 등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전국 이마트 매장의 빵은 ‘조선호텔 베이커리’에서 독점 공급하고 있다.
안정적 유통망 수익도 양호
이처럼 재벌가 딸들의 고급베이커리 사업에 나서는 것에 대해 프리미엄 시장 구축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유통망을 이용해 수익적인 측면에서도 양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실제로 조선호텔, 신세계 베이커리 사업은 지난 수년동안 꾸준히 매출이 증가해 오고 있었다. 조선호텔 베이커리의 지난해 매출은 1600억원에 달한다.
특히 대기업이 가지고 있는 유통망과 자본력에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지 않은 빵 사업은 그동안 다양한 외국 생활을 거친 재벌가 딸들에게는 쉽게 시작해서 성공할 수 있는 유리한 사업기회다.
하지만 재벌가 딸들의 제빵 사업 진출에 대해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이 있다. 오너 일가가 기존 유통망을 이용해 자기 배만 불린다는 비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이마트에 조선호텔베이커리가 피자를 공급하면서 동네상권 침해 논란으로 불거졌다.
당시 저렴한 가격의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피자를 먹을 수 있다는 소식이 확산되어 이마트 피자는 날개 돋힌듯 판매되자 동네 영세 피자집들이 문을 닫는다고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 상황. 기존 유명 프랜차이즈 빵집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마당에 대기업들의 지원을 받는 재벌가 딸들의 베이커리까지 가세할 경우 동네 빵집은 완전히 고사할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는 물론 영세상인들의 입장이다.
계열사 지원 수입 올리는 사업에만 치중
이를 두고 한 재계 전문가는 “재벌에 대한 평가는 양면성이 있지만 1∼2세대는 적어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일자리를 만들고 국부를 늘린 긍정적 측면이 있다”며 “그러나 3∼4세로 넘어오면서 이런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계열사들의 지원이나 기회들을 가져가서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다가 이후에 성공은 쉽게 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재벌가 1~2세대가 진출했던 제조업이 레드오션이 됐다고 판단한 재벌 3∼4세가 초기 투자금의 부담이 크지 않고 계열사의 지원을 통해 높은 수익을 올리는 서비스업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베이커리 뿐만이 아니다. 재벌가 딸의 패션 브랜드 수입도 열기를 더하고 있다. 외국에서 고급 브랜드를 앞다투어 들여와 경쟁적으로 유리한 유통망과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청담동 등에 숍을 개설해 수익을 올리고 있다. 또한 신영자 사장과 세 딸이 지배주주인 시네마통상은 서울·수도권을 제외한 전국 롯데시네마 극장의 매점 사업권을 독점하는 것도 대표적인 예다.
"영세자영업자 전업 기회조차 박탈"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재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재벌 빵집에서 빵을 사먹고, 재벌 커피숍에서 커피를 사먹는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실상 대기업들이 주력사업과 무관한 영역에까지 진출하는 등 문어발식 확장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산업 구조조정 측면에서나 서비스업 선진화 등을 위해 대기업의 서비스업 진출 자체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면서 “다만 서비스업에 기반을 두고 있는 영세 자영업자들의 삶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고 전업의 기회조차 박탈당할 수 있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반면 재벌가 딸이 운영하는 베이커리가 입점한 한 그룹 관계자는 이런 상황들에 대해 “중소상권을 침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며 “이미 프랜차이즈나 기존 빵집이 누리고 있는 상권이 아닌 고급층을 노린 것이라 서로 경쟁관계는 아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