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상공회의소 연설문, 의회합동 연설문, 국빈방문 관련 발언문 3건을 미로비업체에 의뢰, 작성했다는 내용이 알려지자 국내 정치권뿐만 아니라 인터넷 누리꾼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관행이었다’는 청와대의 해명과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인사들의 공식 발표가 이어지면서 ‘친미 사대외교’에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미국 국빈방문 당시, 미 의회와 상공회의소 등에서 했던 연설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대통령 연설문이 미국의 한 로비업체에서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연설문을 위해 정부에서 지급한 금액은 무려 4만6500달러. 우리 돈으로 5180만원에 달하는 비용이다. 미국 로비업체에 돈을 주고, 미국의 입맛에 맞는 연설문을 작성했다는 점에서 혈세 낭비는 물론 국격을 추락시켰다는 비난까지 쏟아지고 있다.
미국 입맛 맞춘 연설문
혈세 버리고 국격 낮추고
미국의 외교전문가조차 “청와대와 외교통상부 등에 영어를 잘하고 한미관계에 정통한 인재들이 많은데도 이 대통령의 국빈방문 연설문 작성을 일개 로비업체에 의뢰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든다”며 “다른 한편으로는 막대한 비용까지 지급했다는 부분에서는 한국의 외교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하는 사례가 아닌가 한다”고 꼬집었다.
대통령 국빈방문 주요연설문을 미 로비업체에 의뢰했다니
국민세금까지 들여 FTA 찬성연설, 국민적 공분과 허탈감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바로 한미FTA 문제다. 한미FTA 국회 비준을 놓고 국내 정치권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시기에 대통령의 주요 현안 발언을 미국 로비업체에 맡겼다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미 의회 연설에서 “의회에서 투표할 때 보니까 반대하신 분들도 계신데, 1년 뒤쯤 ‘그게 아니었구나’ 생각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오바마 대통령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 여긴다”며 미 의회의 한미FTA 비준에 크게 환영의 뜻을 표했다. 국내 여야 정치권에서는 아직 비준 합의를 이루지 못한 상황에 대통령이 상대국에 가서 이 같은 발언을 했다는 자체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막대한 국민 세금까지 들여가며 사대적 외교 행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국민적 공분이 거세지고 있다.
靑 “관행이었을 뿐”
정치권 ‘거짓말 마라’ 질타
이 같은 사실을 최초 보도한 <세계일보>는 최근 공개된 미 법무부의 FARA(외국로비공개법)자료를 통해 주미한국대사관이 연설문 작성 전문회사인 웨스트윙라이터스(West Wing Writers)에 의뢰해 이 대통령의 연설문 초안을 잡고, 수정했다는 내용을 입수했다. 연설문을 외주업체에 맡긴 주미한국대사관의 현 대사는 한덕수 씨로, 그는 참여정부 마지막 국무총리를 지낸 바 있다. 한덕수 대사는 2006년 당시 한미 FTA체결지원위원장을 맡는 등 참여정부에서 한미FTA 체결을 위해 첨병으로 활약하기도 했었다.
이 같은 전적을 가지고 있는 한덕수 대사가 수장으로 있는 주미한국대사관과 웨스트윙라이터스간 계약은 미 상공회의소 연설문 작성과 의회합동연설문 작성, 국빈방문 관련 발언문 작성 등 3건으로 이뤄졌다. 웨스트윙라이터스는 이 대통령의 방미와 관련한 3개 연설문의 초안 작성과 초안에 들어갈 전략적 방향을 제시하는 메모를 제공하는 것으로 돼 있다.
프로젝트A는 미 의회 합동연설문 초안 작성 및 초안에 들어간 전략적 방향 제시와 관련한 메모작성, 미 상하의원들에 대한 분석 및 전략적 충고가 담겨 있다. 실제로, 이 대통령이 의회연설 때 6.25 참전 의원들을 한 명씩 호명하며 이들의 희생에 감사를 표한 것이 이 같은 전략적 충고에 따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들에게 거수경례를 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프로젝트B는 백악관 사우스톤에 도착했을 때 할 연설과 국무부 오찬 때 할 연설, 백악관의 국빈만찬 때 할 연설 등 3가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통해 “한미FTA는 양국 모두 윈-윈하는 역사적 성과”라며 “한미FTA를 통해 두 나라는 모두 미래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향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고 환영의 뜻을 표했다.
아울러, “이는 우리 양국의 기업인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소규모 상인, 그리고 창조적 혁신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승리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연설을 하는 동안 이 대통령은 입장과 퇴장을 포함해 모두 45차례나 의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이는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한 외국 국가원수 가운데 최대 횟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민주당은 “외교적 망신거리”라며 이명박 정부를 향해 맹비난을 쏟아냈다. 민주당 이용섭 대변인은 7일, 이와 관련한 논평에서 “국가의 철학과 가치가 담겨야 할 대통령 연설문을 상대국 ‘로비업체’에 의뢰하고, 거기에 국민의 세금까지 낭비한 상황을 우리 국민이 도대체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강하게 질타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미 의회 연설에서 45번의 박수를 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해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의 그 ‘파안대소’가 국격을 팔아넘긴 대가였다는 속사정을 알고 난 국민들은 수치심과 분노를 함께 느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매번 정부나 청와대 스스로 외교적 망신을 자초하고 있으니, 정부의 외교력은 물론이고 한미 FTA 등 정부 협상력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이라며 “이런 일이 어떤 결정 과정과 누구의 지시로 이뤄진 것인지 명명백백하게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책임을 추궁하기도 했다.
또, “청와대는 매번 반복되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행태로 땅에 떨어진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며 “납득할만한 소상한 해명과 함께 대한민국 국격을 떨어뜨린 행위에 대해 국민 앞에 죄송한 뜻을 밝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태희 대통령실장 ‘과거부터 내려오던 관행이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인사 측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논란이 일자, 임태희 대통령실장은 “과거부터 내려오던 관행”이라며 “해외를 방문하면 각 연설 기회에 어떤 것을 강조하는 것이 옳은지 해당 대사관에 조사를 해서 자료를 보내오고 있는데, 그 중 미국업체가 대상 기관이었던 것 같다”고 발 빠르게 해명에 나섰다. 하지만, 임태희 실장의 이 같은 해명을 두고 참여정부에서 홍보기획비서관을 지낸 양정철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은 “(연설을 외국 외주업체에 맡기는 것이) 관행적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라며 “내가 주무비서관이었는데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양정철 위원은 그러면서 “해외 대통령 순방 연설은 극비사항”이라며 “영혼 없는 공무원은 있을 수 있어도 영혼 없는 대통령 연설은 있을 수 없다. 군사정권 때도 연설을 외국 업체에 맡긴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현 부대변인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 측 인사의 말을 인용해 “국민의 정부 때는 김 전 대통령의 직접 구술에 의해 작성했기 때문에 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임태희 실장의 해명의 허위성을 지적했다.
인터넷으로 번진 ‘국격’ 논란
“美 업체 대변” vs “노력과 정성”
한편, 이 같은 논란은 정치권을 넘어 누리꾼들 사이에서도 크게 이슈가 되고 있다.
한 포털사이트의 게시판에는 “어찌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연설문을 내 나라 사람들이 작성조차 못했다는 것인지,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겠다고 하더니 고작 미국 로비업체에서 만들어준 연설문으로 연설했다는 말이냐”며 강하게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글을 쓴 이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MB는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통치철학이나 국민을 대변하기보다 미국 로비업체가 작성해준 연설문으로 미국 업체의 입장을 대변한 꼴이 된다는 사실”이라며 “청와대나 외통부에는 대통령의 연설문 하나 작성할 만한 인물도 없는 것인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질타했다.
이어, “아무리 미국에서 명사들을 상대로 연설문을 전문적으로 작성하는 회사라고 하지만, 우리의 정서를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잘 알 수는 없으며 우리의 입장을 대변할 수도 없다”며 “훌륭한 연설은 화려한 수사보다도 내용의 진정성이 듣는 이에게 전달될 때 감동을 부르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에 다른, 정부를 옹호하는 글도 올라왔다. 한 누리꾼은 “연설문 하나에도 완벽을 기하려는 노력과 정성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는 “이 대통령의 방미 당시 국회에서 연설은 6.25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참전국이자 동맹국에 대한 감사와 전후 60여년 만에 세계경제 9위로 성장한 우리나라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감동적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며 “신문에서도 밝혔듯이 웨스트윙라이터스측이 제공한 연설문 초안이 그대로 이 대통령 연설에 반영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이어, 언론 보도 내용에 대해서도 “대통령 연설문은 사전에 각계 의견을 수렴해 작성되며,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수정하는 게 관례라고 하는데 주미대사관이나 청와대측의 해명자료 하나 없이 이런 식의 추정보도는 우리 스스로 국격을 낮추는 행동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우리 정서가 다른 만큼 외교적 결례 등 소지를 없애기 위해 참고로 했다면 그 또한 상대국에 대한 배려일 텐데, 이를 수치스럽다고 하는 것은 도가 지나친 표현이 아닐까 한다”고 덧붙였다.
또, “이번 미국 연설에서 이 대통령은 참전의원의 이름을 한명씩 직접 거명하고 거수경례를 해 감동적이었던 장면은 연설문을 누가 작성했건 우리 국민의 하나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라며 “우리나라의 연설문 작성 수준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고 국회 연설의 감동을 깎아먹는 폄훼로 국격을 낮추는 당신들이 더욱 부끄럽다”고 각을 세웠다.
이행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