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6 재보선에서 2040세대의 민심이반을 계기로 여권에서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내년 총선을 불과 5개월여 앞둔 상황에서 쇄신 논의가 터져 나와 총선 공천권을 둘러싼 계파간 다툼이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이번 대통령 비판의 중심에는 친이계 핵심이었던 한나라당 정두언, 정태근 의원 등이 버티고 있다. 정두언 의원은 최근 MBC라디오에 출연, 한나라당 쇄신파의 사과 요구 등에 대해 이 대통령이 함구하고 있는 것과 관련, “심지어 군사독재 때에도 대통령이 국민의 마음에 맞추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민주정권인데도 국민과 오기 싸움을 하느냐. 그래선 안된다”고 강하게 지적했다.
앞서 9일 의원총회에서는 청와대와 여권의 총체적 쇄신을 촉구하며 정두언·김성식·정태근 의원도 당직을 줄사퇴한데 이어 여의도연구소장인 정두언 의원과 정책위부의장인 김성식 정태근 의원 등 쇄신 연판장을 주도한 핵심 3인방은 대통령의 사과와 지도부의 변화를 촉구하며 여의도연구소장직을 사임했다.
친이계 의원,
국민과 오기 싸움해선 안돼
이뿐만이 아니다. 한나라당 원희룡 최고위원도 10일 “당의 쇄신논의에 대해 대통령이 ‘침묵이 지금 내 답변’이라는 말씀을 했는데 정말 걱정스럽다”며 성의 있고 책임 있는 소통의 노력을 당부했다. 한편 이 대통령은 지난 9일 미국 공공라디오 NPR와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 쇄신파 의원들이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를 요구 등 ‘대통령의 5대 결단’ 촉구 서한을 전달한 데 대해 “답변을 안 하는 것이 나의 답변”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사태 발단은 개혁 성향 초선의원들의 모임인 ‘민본21’ 소속 25명이 국민들 가슴에 와 닿는 대통령의 대국민사과, 747공약의 폐기 선언과 성장지표 중심의 정책기조 수정, 인사쇄신, 권위주의 시대의 비민주적 통치행위 개혁, 권력형 비리에 대해 투명하고 신속한 처리와 검찰개혁 등 ‘대통령의 5대 결단’을 촉구하는 연명부를 지난 6일 청와대에 전달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두고 이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등 감정싸움으로 번지면서 특히 친박계 의원들은 당쇄신을 빌미로 내년 총선 공천권을 장악하려는 MB계의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는 당쇄신 방안으로 중앙당사 폐지, 신진 인물 대거 영입, 비례대표의 50%를 국민참여경선으로 선발, 정치 신인은 ‘슈퍼스타K’식 공개 오디션 방식으로 공천 등 획기적인 구상을 내놓았지만, 지난 7일 열린 ‘당혁신 최고위원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겉으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 이후에 본격적으로 쇄신안을 논의하는 것으로 지도부가 회의를 매듭지었지만, 소식통에 의하면 이날 홍 대표가 내놓은 쇄신안에 친박계 의원들이 강력히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5대 결단’ 촉구
연명부 청와대 전달
유승민(친박계) 최고위원은 “당사 폐지 운운에 대해 국민은 아무 관심이 없고, 비례대표를 ‘나가수’식으로 뽑는 것은 한 마디로 쇼”라고 강하게 쇄신안을 비판했다. 유 최고위원은 “앞으로 청와대와 정책 차별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공천 권한을 홍 대표가 내려놓는 게 쇄신”이라고 말했다.
영남권 친박계 좌장인 4선의 박종근 의원은 내년 총선에서 국민 참여경선 등을 도입하자는 당 쇄신안에 대해 “일부 전략지역을 제외하고는 상향식 공천이 의총에서 승인되고 최고위에서 검토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당을 흔들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특히 이번 당 쇄신에 앞장 선 인사들이 주로 친이(MB)계 성향인 것과 관련, “이명박 정부들어 최고위원도 하고 주요 당직을 두루 다 거치면서 과실을 거뒀는데, 지금에 와서 대통령이 인기가 없다고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개가 주인을 무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이들이 쇄신파의 당 개혁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은 그동안 당내에서 개혁 얘기가 나올 때마다 친이계와 소장파들로부터 친박계 중진들이 ‘개혁대상’으로 거론됐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공천시스템을 바꿔 친박계를 물갈이해야 한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우선 물갈이 ‘0순위’로 거론되고 있는 그룹은 영남권 중진들이다. 이들은 한나라당 텃밭인 영남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잡아 왔기에 출마만 보장된다면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다. 따라서 당 쇄신과 개혁을 주장하는 소장파와 중립성향 의원들로부터 개혁공천의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소장파 의원 주축 ‘공천개혁
실행준비위원회’(가칭)구성
나경원 최고위원은 아예 ‘완전국민경선제’ 도입을 위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상태다. 친이계, 소장파, 중도성향의 142명이 발의 서명에 참여했다. 지난 5월9일 발의된 이 법안은 지난 6월 16일, 20일, 24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선거법소위에서 상정돼 때를 노리고 있는 상태다.
국민경선제 도입과 전략공천비율 제한을 골자로 한 공천개혁안을 주장하고 있는 소장파의 경우 초·재선 의원 20∼30명을 주축으로 ‘공천개혁실행준비위원회’(가칭)를 이미 구성했다.
나 최고위원은 서울시장 선거 패배의 후유증으로 현재 최고위원회의에 불참하고 있지만, 다시 당 개혁의 중심에 나설 경우 공천방식을 둘러싼 계파간 갈등이 더욱 불거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한나라당의 독보적인 대선 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는 이번 쇄신논쟁에서 한발 비껴 선 채 민생행보에만 주력하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최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쇄신은 국민의 삶에 다가가는 것이 먼저”라며 “쇄신파의 요구는 귀담아들을 만하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박 전 대표 측은 “과거처럼 보여주기 식으로 국민에게 다가가기 보다는 실제적인 민생정책을 내놓는 것이 급선무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박 전 대표는 당혁신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며 민생 현장방문 등 활발한 서민 행보를 펼치고 있다. ‘생활복지’ 중 보육·교육비·전셋값 등에 대해 그동안 마련해 온 정책을 순차적으로 발표하는 한편 관련 법안 제출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홍준표 대표는 이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쇄신안에 대해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과 홍 대표간 회동에서는 당내 소장파 의원 25명이 요구한 대통령 대국민 사과, 747(7% 경제성장,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7대 경제강국) 폐기 등의 쇄신안을 비롯해 개각 문제 등 다양한 현안이 거론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행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