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FAT 비준동의안 강행처리에 대한 판사들의 강도 높은 비판이 계속되고 있어 주목된다. 처음 이를 비판한 인천지법 최은배 부장판사와 함께 ‘날치기’라며 소신발언을 계속하던 창원지법 이정렬 부장판사는 2일 한미 FTA에 대해 신랄히 비판했다.
이정렬 부장판사는 이날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우리나라에서는 법적으로 FTA 협정이 국내법보다 우선하게 돼 있는데, 미국에서는 FTA 협정보다 연방법이나 주법이 우선하게 돼 있으니까 불공평하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개방한 방식을 보면 협정에 명시된 사항을 뺀 나머지를 개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네거티브방식이라고 하는데, 아직은 우리가 미국보다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하면 우리나라한테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역진방지조항이라고 해서 한번 개방된 수준은 어떤 경우에도 되돌릴 수 없게 만들어놨는데, 예를 들어 우리 정부가 경제적 약자를 보호할 필요가 있어 정책을 바꾸려고 해도 바꿀 수가 없게 막혀져 있어 미국보다 약자인 우리나라한테 아주 불리하고 불공평하다”고 설명했다.
이 부장판사는 그러면서 “무엇보다 판사인 제가 크게 관심 갖고 있는 건 우리나라 사법주권이 침해됐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말씀드린 불리한 조항들 때문에 향후 미국 투자자가 한미 FTA 협정위반을 이유로 우리 정부를 상대로 분쟁을 벌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데, 그런 분쟁이 생겼을 때 당연히 우리 법원이 재판권을 가져야 되는데 엉뚱하게 제3의 중재기구에 관할권이 있는 ‘ISD 조항’, 이 부분이 판사 한 사람으로서 가장 심각하게 보는 부분이다. 우리 법원의 재판권, 주권 중에서 사법권이 박탈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이 부장판사는 특히 “판사란 직업이 어떤 행위가 법적 요건에 맞는가 아닌가 판단하는 직업인데, 이번에 통과된 협정비준안을 보면 실체적인 부분에 있어선 대한민국 주권인 사법권을 대한민국 법원이 아닌 외국 중재기관에 넘기는 것은 주권을 팔아서 나라를 팔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개탄했다.
이어 “절차적인 부분에 있어선 비준안이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도 않고 ‘비공개 날치기’로 통과돼 가지고 토론과 소통을 참 중요한 가치로 해야 되는 민주주의가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에서 오히려 유린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법을 하는 판사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너무나 화가 났었다”고 소신발언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다른 법관들의 반응에 대해 이정렬 부장판사는 “한미 FTA의 불평등을 지적하는 김하늘 부장판사 글이 게시된 지 12시간도 안 돼 지금 116명 이상의 판사가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앞으로 동의 의사를 표시할 판사들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법관이 소신발언을 표출하는 것이 국가공무원법, 법관윤리강령이 제시하는 정치적 중립의무에 위배되는 것 아니냐’라고 달갑지 않게 보는 일부 시각에 대해, 이 부장판사는 “한미 FTA 협정 중에서 ISD에 관한 문제는 사법주권에 관한 거고 법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법률가인 판사들에게는 본연의 업무에 관한 것이어서, 이건 법적인 문제고 당연히 정치적 중립의무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판사 업무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만약 판사업무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 판사들이 얘기하는 게 정치적 중립의무에 위반된다면, 요즘에 검경수사권 조정문제가 나오고 있는데 수사권 조정문제 본연의 업무에 관해 말하는 검사들이나 경찰관들 모두 자기 업무를 얘기하는데 이거 다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하고 있는 셈이 된다”고 역설했다.
대법원 윤리위원회가 SNS 사용에 대한 신중한 자세를 권고한 것에 대해서도 이 부장판사는 “판사들이 SNS에 사적 의견을 개진하는데 특별히 금지할 근거도 없고 명분도 없으니까 윤리위원회에서 나온 권고안을 보면 ‘자기절제, 균형적 사고, 품위위지, 분별력,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놓이게 되거나 공정한 재판에 영향을 미칠 우려를 낳을 수 있는 외관을 만들지 않도록 신중히 해라’는 추상적인 개념들”이라며 “그래서 오히려 판사들이 앞으로 SNS를 사적인 영역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얼마든지 개진해도 좋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석했다.
또 대법원 윤리위원회가 SNS 이용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 부장판사는 “저는 참 외람되지만 판사들 대부분이 지혜롭고 신중한 편이어서 얼마든지 자발적으로도 할 수 있는데, 왜 대법원이 그걸 지침을 정해주려는지 이해는 안 간다”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는 “왜냐하면 지금 법원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병폐가 법관이 계속 독립성을 상실해가면서 관료화 되고 있다는 게 문제인데, 대법원이나 법원행정처는 판사들에 대해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거기서 기준을 만들어버리면 그게 아무리 권고사항이라고 하더라도 판사들한테는 권고가 아니라 그냥 통제지침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너무 높다”고 우려하며 “그래서 SNS를 자주 쓰는 판사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논의를 해서 기준을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나라는 움직임도 있다”고 전했다.
페이스북에 “개그콘서트를 보면서 자기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하는 개그맨 분들이 너무 부럽다”라고 올린 글에 대해, 판사 출신인 김영선 한나라당 의원이 “현재 지위와 권력에다가 연예인의 권한과 정치적 권한도 누리고 싶다는 얘기 아니냐”라고 비판한 것과 관련, 그는 “참 어이가 없었다”며 “저는 ‘개인으로서 헌법적 권리인 표현의 자유도 못 누리나’라는 생각에서 그냥 우스갯소리로 한 건데, 요새 정치인들께서 가벼운 우스갯소리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 부장판사는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이나 영향력 있는 언론사에서 훨씬 낮은 지위에 있는 판사들 수준보다 너무 저급하게 하는 지적에 대해서 대꾸하고 싶진 않다”며 “제가 판사 안 하고 개그맨해서 국민들께 희망이나 기쁨을 드릴 수 있다면 당연히 개그맨 할 것 같다. 그런데 요새 개그맨 보면 너무 탁월해서 저는 발끝도 못 따라갈 것 같다”고 힐난했다.
한미 FTA 비판을 언론이 자꾸 진보성향 판사들의 한술연구모임인 ‘우리법연구회’와 연관 짓는 것에 대해 “우리법연구회에서 매해 세미나를 하는데 한미 FTA 관해 논의된 바 없고, 우리법연구회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의견을 낸 적도 없다”며 “이렇게 판사들 문제 불거질 때마다 우리법연구회랑 관련지어서 보도하는데 억울하기도 하고 화가 많이 난다. 사법부 판사들에 대한 오해거나 아니면 정치적 음모가 있어 그런 게 아닌가”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어 “최은배 부장판사도 그렇고 저도 우리법연구회 말고 다른 학술단체에도 많이 가입돼 있는데, 그 학술단체는 문제 안 삼고 왜 꼭 우리법연구회하고만 연관을 짓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며 “그래서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정치적 목적이 있더라도 제대로 알고 (보도) 했으면 참 고맙겠다”고 언론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한편 양승태 대법원장이 1일 경력법조인 신임법관 임명식에서 판사들이 발언을 좀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한 것에 대해 부담스럽지 않느냐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이정렬 부장판사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많이 떨린다”며 “혹시라도 불이익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